이 영화는 죄책감에 대한 영화다. 영화에 시작은 있지만 종결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죄책감은 시간이 흐르면서 의식 표면 아래로 가라앉지만 그렇다고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보상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짐작컨대 원작도 그랬을 것이고,(원작은 그렇지가 않더군. 이 리뷰는 소설을 읽기 전에 썼다. 소설 리뷰는 여기 있다)) 영화는 그 점을 정확히 짚고 있다.
지미, 숀, 데이브는 한 마을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 친하게 지냈지만, 어느 날인가 세 사람이 놀던 중 데이브가 납치되어 성적으로 학대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그들은 천행으로 데이브가 돌아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예전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지 못한다. 세 사람은 자연스레 소원해졌고, 20년이 지난 지금은 여전히 아는 사이이긴 하지만 더 이상은 서로를 '친구'라 부르지 않는다. 지미는 한때 범죄에 몸을 담았었지만 지금은 손을 털고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고, 숀은 대학을 나와 경찰이 되어 마을을 떠났으며(내가 받은 인상은 그랬다), 데이브는 그 불행한 사건 이후로 완전히 안으로 움츠러들어 조용하고 소극적인 삶을 살고 있다.
지미의 큰딸이 살해당하면서, 세 사람의 삶은 다시 한데 얽혀든다. 숀은 이 사건을 수사하게 되고, 데이브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 밤 모종의 사고를 당해 부상을 입었다. 그 부상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기를 거부하면서 데이브는 서서히 용의 선상으로 떠오르고, 숀은 데이브를 보호하길 원하지만 공적으로는 경찰로서의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하며, 지미는 사적인 복수를 위해 독립적인 수사망을 짜 살인자를 찾는다.
이들은 모두 그들이 11살 때 데이브에게 일어났던 사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유년 시절의 폭력은 한 사람에 대해서 행해졌지만, 그 폭력은 세 사람 안에 모두 살고 있었다. 피해자였던 데이브를 한 마을에서 끊임없이 마주쳐야 하는 지미는 물론이거니와, 셋 중에서 그나마 성공한 사람이 되어 그 마을을 떠나 이제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이는 숀조차도 그 폭력의 기억을 끊임없이 회상한다는 걸 영화가 직접 보여준다. 케이티의 살해자를 찾기 위한 면담이 진행중인데 뜬금없이 데이브 이야기를 꺼내는 지미의 모습이나, 아직 우린 지하실에 갇혀서 달아나기를 원하는 11살 소년이라고 뇌까리는 숀의 모습. 셋은 그 사건 이후 흩어져 그 뒤로는 서로의 삶을 거의 나누지 않고 살아왔지만, 정작 그들은 항상 서로 속에 있었던 것이다.
데이브의 죽음은 두 친구에게 새출발을 시작하도록 해주는 '희생'이 아니다(씨네 21에 그렇게 쓴 기자가 누구냐). 그건 그들이 평생 갖고 살아왔던 죄책감, '그 차에 탄 게 데이브가 아니라 나였다면/우리가 그 때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지 않고 무언가 했더라면'이라는 죄의식 위에 더 큰 하나를 얹은 거다. 지미의 부인 애나베스는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로 그걸 정당화하지만, 그 전에 이미 죄책감을 평생 지고 살아왔던 지미는 그들의 침묵이 그렇게 덮어두고 지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데이브를 죽인 것보다 더 큰 죄는 데이브의 '실종'에 제대로 된 이름을 찾아주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숀도 공범이다). 둘은 앞으로 계속 살아나갈 것이고, 어쩌면 겉으로 보기에 꽤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가정을 유지하겠지만, 이미 그 삶은 텅 비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더 난감하게도, 20여년 전에 있었던 데이브의 납치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에게 책임졌어야 할 진짜 '죄'가 있다.
20여년 전에 있었던 일이 데이브만이 아니라 세 사람의 삶을 모두 갉아먹었듯, 남은 두 사람의 삶은 이제 중첩된 두 사건에 평생 저당잡혀 있게 될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그런 공허함이 느릿느릿 허공을 떠돈다. 암담하고 막막하다.
* 잡담
1. 숀이 마을을 떠났다는 인상을 받은 것은, 영화에서 그가 묘사되고 행동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데이브와 악수하면서 '7,8년 만인가?'라 건네는 첫 인사 때문이기도 하고, 대학까지 나왔다는 묘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가족' 때문이다. 지미와 데이브는 모두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아이들도 잘 자라고 있는 듯 보이고. 그러나 숀은 아이를 갓 낳은 상태에서 아내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지가 6개월이 되어간다. 카톨릭 교회가 마을 생활의 자연스런 일부인 것처럼 묘사되는 것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공동체(보스턴의 아일랜드 계 마을이라는데, 지미가 카톨릭인 것으로 보아 그런 것 같다)는 '정상적인' 인간 관계를 맺으려면 적당한 나이에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야 하는 사회인 것 같았다. 마지막에 조금은 뜬금없이 애나베스가 가족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왕으로서의 아버지' 이야기로 지미를 위로하는 것도 그 맥락 안에 놓여 있을 것이다.
(대개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긴 연설은 감독이 하고자 하는 말일 때가 많아서;;, 그 대목에서 잠시 멈춰서 설마 이 영화의 주제가 저거였단 말인가, 하고 황망해했었다.)
1. 세 사람을 관통하는 죄의식의 코드는 저뿐이라 따로 떼서 이야기하게 되는데, 지미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해친 자를 직접 응징하는 것도 결국은 죄의식에서 출발한다. 지미가 데이브를 죽이기 직전에 한 얘기에서 나타나듯, '그냥 레이'를 죽여서 수장해버린 근본 요인은 레이가 지미를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 옆에 있을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고(아내에 대한 책임감), 케이티를 유난히 아끼고 살인자를 직접 찾아나서 경찰이 찾기 전에 죽여버리겠다고 하는 것도, 어렸을 때 그 아이 옆에 있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1. 위에서 말할 기회는 없었지만, 실은 우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미가 죽여서 영원히 묻어버렸던 레이의 아들이 결국 지미의 딸을 살해하게 됐다는 내용 역시 시사적이었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친척이고 아는 사이인 그런 좁은 마을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런데 보스턴 안에 그런 소위 '토박이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는지 전혀 몰랐다. 대도시에는 보통 그런 곳이 없다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나?? 그저 내 편견인가?
1. 케빈 베이컨은 팀 로빈스와 동갑이고, 둘은 숀 펜보다 두 살이 많다. 팀 로빈스의 역이 역이긴 하지만, 믿어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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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01. 03)
영화를 먼저 본 뒤 책을 끝까지 읽고 느낀 당황스러움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무게나 울림이 모두 묵직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 마지막에 무언가 조금씩 어긋난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은 모두 책의 감정선을 따른 연출이었다. 그게 내가 영화를 잘못 보았다는 뜻이 되는지 알고 싶었다. 내가 순서를 잘못 밟아갔나 싶어 주위에 이걸 읽거나 본 분들을 상태로 탐색전을 벌였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셨나,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았다면 달랐을까 생각했다.
지금은 그냥, 영화는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 방식대로 받아들이고 책은 버리는 길을 택했다. 루헤인의 데뷔작인 '살인자들의 섬'을 읽고 나니 포기가 빨랐다.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그 이야기 역시 비슷한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반전을 높이 평가하시는 분들도 많이 뵈었지만 나는 견해가 다르고, 물론 나와 같은 견해를 가진 분들도 계시다.
감독이나 이 소설의 각색을 담당한 Brian Helgeland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디까지 연출했는지는 모르지만(DVD에 언급이 나오는지 궁금한데 아시는 분 계시면 알려주시길) 소설대로라면 좋아할 수 없는 이야기라 그냥 내 식대로 기억하는 데 별 저항감이 없다. 제멋대로긴 하지만 어쩌겠어.
그리고 왜 처음에 쓰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 각색/각본을 맡은 Brian Helgeland는 이것 말고도 각색 잘 된 영화로 유명한 'LA 컨피덴셜 L. A. Confidential'에서 바로 그 작업을 맡아 했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두 영화로 다 오스카를 받았다. 오스카를 떠나서, 정말 대단한 재능이라 생각한다. 각색도 독립적인 예술이라는 사실을 이 사람의 작업을 보고 처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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