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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카페타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지요. 원작은 'Postmortem'이라는 제목으로 1991년에, 한국어 번역본은 '검시관'이라는 제목으로 장원에서 1993년에, '법의관'(유소영 역)이라는 제목으로 노블하우스에서 2004년 출간되었습니다. 읽다 보면 아시겠지만 아랫글은 노블하우스 판을 읽고 쓰는 글이에요. 번역본 서지정보의 출처는 알라딘입니다.


  아래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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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의관’의 핵심을 꼬집어 말하라면, 저는 연쇄살인에 대한 소설이라는 점을 들겠습니다. 연쇄살인 수사는 그야말로 증거와 프로파일링의 게임이죠. 법의학자를 주인공 삼는 소설에서 그보다 더 이상적인 선택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법의관’을 바라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점들이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이 소설이 연쇄살인을 다루는 방식, 수사에서 우연이 작용하는 정도, 수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관계자들이 되는 주변 인물(앰버지나 볼츠, 태너, 턴불 같은)들의 움직임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법의관’은 연쇄살인이 시작된 지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스카페타가 마리노의 호출을 받고 새벽에 일어나는 장면에서 이미 살인은 세 번이나 저질러졌었고, 이제 막 네 번째 살인이 일어났죠. 소설에서 법의학적 측면들이 실제로 탐구되는 것 역시 주로 이 마지막 두 번의 살인에 대해서입니다. 저는 이 점이 ‘법의관’이 연쇄살인을 다루고는 있지만, 상당히 교묘하게 연쇄살인이라는 걸 비껴가며 다루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리노는 1권의 반 이상 스토리를 까먹어 가며 네 번째 피살자 로라 피터슨의 주변 인물(남편)이 살인을 저질렀을 가능성에 집착하고(이 점은 일만을 놓고 봤을 때 ‘법의관’에서 마리노와 스카페타의 가장 큰 갈등 요인이었지요), 다섯 번째의 살인에서는 피살자가 거물급 기자의 동생이라는 점 때문에 특히 피살자의 주변 인물이 부각됩니다. 연쇄살인이 소재지만, 교묘하게 그걸 등장 인물들의 주변 사람들과 연계시키고 있는 거지요(그런 의미에서, 책의 도입부에 이미 세 번의 살인이 일어난 상태라는 점은, 다섯 번의 살인에 대해 다 그 작업을 한다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시작한 게 아닌가 합니다.) 중간에 볼츠가 용의자 선상에 오르게 되는 것도 그런 ‘얼굴 없는 익명의 범인을 추적해야 하는 사건에서 막연함을 걷어내고 구체성을 부여하려는 시도’의 일환이겠지요.


  연쇄살인을 둘러싼 감정의 드라마는 피해자 주변 인물들 사이에서 발생하거나, 수사진에서 발생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피해자 주변 인물들이 보여줄 수 있는 감정은 매번 거의 반복적이고, 수사진이 보여줄 수 있는 감정에는 한계가 있죠. 수사진이 사건 밖의 그들의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 쪽으로 팔 수도 있겠지만, 이건 자칫 잘못하면 사건과 별개로 진행되어 사건에는 해가 되기 쉽습니다. 두 ‘감정선’이 사건 흐름 속에서 유리되어 스토리라인이 둘이 되니까요. ‘법의관’은 그런 문제를 교묘하게 사건 자체를 관계자들 안으로 끌어들여옴으로써 해결하려 했던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1권 중반의 법의관실 컴퓨터 해킹 문제, 2권 초반의 남는 증거 문제 모두 수사진 안에 긴장을 유발하게 되잖아요. 볼츠 검사가 용의자 선상에 오르는 것도 플롯 상으로는 그런 서스펜스를 극대화시킵니다. 일종의 절충안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말에서 범인이 스카페타 박사 살해를 시도하다 죽는 결말이 한편으로는 좀 지나치다고 느끼면서도(심한 주인공주의랄까요) 일관성 있다고 생각하는 건 그 점 때문입니다.


  구성적 측면에서, ‘법의관’에서 범인으로 인도하는 모든 증거들은 소설 전체에 걸쳐 상당히 정교하게 심어져 있습니다. 범인이 특이한 체취를 가진 인물이라는 점, 범인이 911 전화를 받으면서 피해자들을 처음 점찍었을 거라는 점에 대한 근거는 로라 피터슨의 남편의 진술 속에 이미 다 들어 있지요. 지나가는 말처럼. 그렇게 복선이 잘 짜여져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작위적인 느낌이 전혀 없어요.


  모든 증거의 발견은 어찌 보면 일종의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지나치게 적재적소에 증거가 놓여 있는 건 픽션에서는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기 힘들 위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법의관’에서는 워낙 물흐르듯 사건이 진행되어, 어색하다거나 끼워맞췄다거나 하는 느낌이 별로 없이 전개가 매끄러웠습니다. 용의자 범위를 단숨에 좁혀주며 함정수사의 단초를 제공하였고 동시에 가장 작위적이라 할 수 있을, ‘타고난 희귀병’이라는 설정도 그렇게 처음부터 탄탄한 복선을 깔아둔 위에 제시되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 위에 범인이 어떤 식으로 희생자들을 골랐는가에 대한 스카페타의 비약적인 논리 전개(운이 좋아 맞은 것이지 그 생각에 어떤 필연적으로 합당한 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니므로)가 함께 맞아떨어지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사건 관계자들의 움직임. 이 점은 첫 번째 요소를 설명할 때 거의 함께 말한 것 같은데, 볼츠라던가 앰버지 등등 일선의 수사진은 아니지만 수사를 뒤에서 보조하고 감독해야 할 입장에 있는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수사에 암적인 존재들이 되었더군요. 앰버지는 스카페타와 법의국의 평판을 깎아내리려는 일념에 연쇄살인 수사를 사보타지하고, 앞으로 있을 재판(결과적으로는 없게 됐지만)에 흠집을 내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볼츠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수사를 방해하지는 않지만 경찰의 용의자 선상에 오르면서 잠시나마 연쇄살인범으로서의 가능성이 점쳐지지요. 간단하게는 사건 수사를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이고, 주인공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도 나름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데, 이들 모두 결국 사건을 주인공 주변으로 끌어오는 결과를 낳는 데 기여한다고 봅니다.


  저는 스카페타라는 주인공의 개성(여성이고 법의학자이며 수사관이라는 점, 사적으로는 혼자 살고 아이도 없으며 상당히 폐쇄적인 성격이고 이성적인 완벽주의자인 데다 스스로를 황폐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좋아하고, 그 개성이 당연히 시리즈의 전면으로 부각되어야 한다는 점에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리즈의 첫 작품인 ‘법의관’이 법의학자로서의 스카페타와 한 개인으로서의 스카페타를 모두 그려내는 데 있어 그 두 가지를 한데 섞는 방법을 택했다는 건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연쇄살인이라는 건 무작위적이고 얼굴 없는 범죄라는 게 그 큰 특징인데, 그걸 정공법으로 다루지 못하고 약간 안이한 선택을 한 건 아닌가 싶거든요. 특히 스카페타의 집으로 범인이 스카페타를 습격(?)해 들어오는 결말이 너무 센세이셔널해졌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겠습니다. 그 후로 시리즈가 걷기로 선택한 길을 7권까지 따라가봤을 때 아직 그 숙제가 완전히 풀린 것 같지는 않군요.





  (2005. 01. 06)


Posted by Iphin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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