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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머셋 모옴(동서에서는 '모음'으로 썼더군요. 어느 쪽이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입에 익은 게 이쪽이라..)이 1차 세계 대전 때 첩보원으로 활동했던 경험을 살려 쓴 소설입니다. 책 뒤의 소개에 따르면 옴니버스 식 단편집이라는데, 각각의 스토리가 독립성 못지않게 연계성 또한 강해서, 그냥 한 편의 장편소설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한 장이 끝나고 휴지기를 두고, 제목 다시 달고 시작하는 여느 단편소설집의 구조를 택하지 않고 소제목처럼 작게 타이틀 붙인 다음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이어붙이는 식으로 편집한 것도 그런 점 때문인 것 같아요.


  작가의 분신인 듯한 첩보원 ㅡ 여러 나라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작가인데, 전쟁이 터지자 영국 정보부에서 스카우트해 이런저런 첩보 업무를 맡기게 되는 사람입니다 ㅡ 이 지령을 받아 이런저런 장소에서 다양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중심 내용이긴 하지만, 임무의 자세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그게 핵심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센덴'은 주인공 어센덴이 정보부의 밀명을 받아 이런저런 일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스쳐가는 다양한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열과 마음은 과거에 묶어두고 허물만 남아 현재를 가면 쓰듯 살고 있는 외교관도 나오고, '미국인다운' 에너지와 고집으로 똘똘 뭉친 저돌적인 기업인도 나오고, 사랑과 자신의 안전 사이에서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전쟁통에 많이 있었을 모습이죠)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도 있고, 작게 지나가기는 하지만 아들의 안전을 위해 위험을 매일 감수하는 어머니도 있습니다. 심지어 인간을 관찰하는 것을 직업적 습관으로 삼는 어센덴조차도 쉽게 파악해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죠.


  어센덴은 그들이 엮어가는 이야기에 참여하지만, 일종의 초연함으로 주어진 일들 또한 처리합니다. 서머셋 몸의 작품 중 읽은 것은 예전에 범우사에서 냈던 (것 같은) 단편집 하나밖에 없지만, 냉소적인 아이러니로 종교적 윤리의 허구성을 짐짓 담담하게 그렸던 비(Rain)라는 작품이 인상에 남았었습니다.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정도는 아니지만, 동정심 없이 인간을 관찰하는 시선이라고 할까요, 그런 걸 느꼈었는데, '어센덴'도 그런 점에서는 비슷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그게 불편하지는 않은데, 그럼에도 그게 왜 불편하지 않단 말이냐...까지는 아직 대답을 못하겠습니다.^^


  좋은 책이군요.



  (2004. 03. 16)


Posted by Iphin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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