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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정적인 스포일러는 없습니다만 중요한 이야기 중 하나를 미리 해버렸는지도 모르겠네요. 다들 금방 짐작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굳이 숨기지 않았습니다.)




  옥스퍼드의 4증인 (An Instance of the Fingerpost)



  제가 좋아하는 네 가지 요소, 혹은 그 중 세 가지 요소(배합은 책마다 다르지만)를 포함하는 일련의 책들이 그 동안 제법 출판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역사 미스테리'라고 불리더군요. 우리 나라 독자들이 좋아하는 유형의 소설이라면서요? 저도 좋아하는고로 이 부류에 들어갈 만한 새로운 책을 접하게 될 때마다 기쁘긴 합니다만, 그 동안 접했던 책들이 현저히 질이 떨어지거나 자신이 다루는 대상에 대한 진지한 탐색이 결여되어 보이는 경우가 많아서, 실망을 많이 하고는 어느 순간 기대를 접었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정말 좋았습니다. 강추!!입니다. 이 제목은 구판 제목이고, 지금 시중에 도는 책은 제목이 '핑거포스트'라고 알고 있습니다.



  17세기 왕정복고 시대의 영국에서 일어난 한 살인사건과 그 숨겨진 진상을 네 명의 증인이 각각 자기가 바라본 대로 서술하는 구성인데,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사법살인'이 주는 서스펜스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사법살인을 지휘하고 뒤에서 덫을 놓은 사람은 이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어보였고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도 물리적으로 상당한 거리를 갖고 있었던 전혀 뜻밖의 인물입니다. 진실은 표면에 드러나 있지 않았지만, 그에 관계했던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완전한 지식을 손에 쥐지 못하지요. 뒤에서 진두지휘한 자조차도 말입니다. 몇십 년이 지난 뒤에야 '진상'을 알게 되는 한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도 다른 사람들의 증언이 없었다면 결코 나머지 퍼즐을 끼워맞추지 못했을 겁니다. 네 사람의 증언은 각기 전 사람들의 증언을 뒤엎으면서 진행됩니다. 머리가 좀 아프고, 지루할 수도 있지만, 덕분에 소소한 서스펜스도 놓치지 않습니다.



  두 번째의 매력이라면,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현재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너무도 교묘히 결부되어 있어서 사건에 정말로 긴박성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구성하는 네 명의 증인 중 첫번째 인물인 콜라의 증언은 서막을 열고 기본을 제공하며, 외부에서 들어와 앞뒤 사정을 잘 모르는 입장인 이방인의 모험소설에 가깝습니다. 콜라는 스스로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존재로 묘사하죠. 이 사람의 증언만을 통해 볼 때 드러난 것은 그 자체로 명백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증인인 잭 프레스콧의 증언은 이 사건이 과거에 있었던 다른 사건과 결부되어 있었다는 걸 알게 해 줍니다. 그의 증언은 완전한 본격추리물로서, 어찌나 정통적이었던지 그의 증언을 뒤에서 뒤집게 될 세 번째의 증언이 어떤 내용으로 채워질지 대충 가늠이 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예측하지 못했던 부분들도 물론 있지만요. 그 다음 증인인 월리스의 이야기는 스릴러의 요소가 조금 더 섞여 있고, 그 나름의 '진상'과 '반전'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네 이야기 중 가장 흥미롭습니다. 월리스는 물적 증거보다는 사람들의 증언과 정황적 증거를 토대로 비약적 추리를 통해 사건의 얼개를 끼워맞춰 나가는데, 나중에 그것들이 네 번째 증인인 우드의 증언을 통해 어떻게 반박되어 가는지를 보는 게 아주 재미있거든요. 우드의 증언은 앞서의 세 증언을 정리하면서 진상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그들이 수사했던 '그 당시의 사건'과 그들 전 세대에 있었던 '과거의 사건'이 어떻게 맞물려돌아가 사법살인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는가, 그 과정에서 무엇이 은폐되었는가가 드러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의 매력은 물론, 이 책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입니다. 당대 영국을 운영했던 정치인과 귀족들은 물론이고, 리처드 보일에 존 로크에 크리스토퍼 렌까지, 그리고 전 전혀 몰랐지만 수학자나 암호학자라면 월리스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지도 모르는 노릇이죠. 전 개인적으로 보일과 로크에서 가장 재미를 보았는데, 보일은 워낙 유명한 화학자기 때문이고, 로크는 제가 예전에 수업시간에 담당해서 조원들과 함께 발제를 준비하기도 했던 인물이랍니다. 물론 서양정치사상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지요. 저희는 로크의 '통치론'을 나누어 읽었고, 그 사람의 생애에 대해서도 조사했었습니다. 주로 명예혁명과 관련해서였지만요.



  과거의 일, 특히 남의 나라에 있었던 일에 대해 수박 겉핥기 식으로 배울 때, 우리가 잘 잊어버리는 것은 '쉽게 일반화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원칙이 아닌가 합니다. 역사책은 아주 자주 특정 세기의 '특징'을 몇 줄로 요약해주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 문제를 갖고 수없이 다른 입장을 가졌을 테니까요. 크롬웰의 사후에 일어났던 왕정 복고에 대해 전 '물리적 마찰이 없었다'고 들은 기억만 갖고 있었지만, 그 말이 갈등의 존재까지 없애주는 건 아니라는 거죠. 역사적 기술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대해서도 함부로 판단하는 대신 끊임없이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걸 이런 책들이 환기시켜 주었달까요.



  (2005. 01. 31)


Posted by Iphin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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