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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

카테고리 없음 2008. 10. 17. 13:06

  생각을 떠올리기만 하고 발전시키는 데 약하다는 게 내 문제인데, 이건 끈기보다는 소질의 문제다.


  Anyhow, 폴 벤느의 책 중 그리스인들이 과연 신화를 진정으로 믿었던가 하는 문제에 천착한 책이 있다. 그 문제의식에서 시작하고 거기 집중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은 우리가 어떻게 현실을 인식하고, 서로 다른 물리법칙이 작동하는 것 같은 다른 세계관들과 어떻게 화해하고 그들을 한몸에 끌어안고 사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예로 말하자면 현대 물리학의 법칙에 기반해 우리 우주가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규정하고 예수가 죽은지 3일만에 무덤에서 되살아났다는 기적을 동시에 믿을 수 있느냐에 대한 얘기인 것.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나는 픽션의 세계에 있는 캐릭터들을 일면 내 이웃보다 가깝게 느끼고 있었고, 때문에 '결국 실제도 아닌 이야기에 왜 그렇게 마음을 쏟느냐'는 지적을 실제로 들어봤거나 아니라도 늘 의식하고 있었다. 저 책의 논의를 나는 내 멋대로 편의적으로 전용해 그런 내 성향을 정당화하는 데 써먹었던 것 같고, 덕분에 고마워하고 있다ㅡㅡ;;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니까 현실/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그것이 내가 그에 대해 감정을 느끼는 것에는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모든 감정은 그 자체로 진실이다. 하여 픽션과 현실을 기묘한 방식으로 섞는 나의 현실 감각은 이런 식으로 발전했다. 일단 정붙이게 된 캐릭터가 생기면 그를 둘러싸고 픽션적 현실이 생겨난다. 그에 대한 내 감정은 진실하다. 그리고 그 뒤로는 내 선호에 어긋나는 그 캐릭터의 행동은 작가와 제작진의 탓으로 돌린다. 매우 편리하긴 하지만 생각할수록 정신분열적인 현실 인식이다.


  그런데 최근 정붙이는 픽션 캐릭터가 하나 또 늘면서 이게 내 정신건강에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특정 드라마^^에 대한 내 애정이 힘들었던 90년대를 버텨내는 데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 드라마에 몇 년 나왔다 사라지는 캐릭터들은 대부분 결말이 그다지 좋지 않다. The West Wing의 샘 시본의 경우 같은 건 매우 드물다. 오죽하면 소킨이 샘의 퇴장을 "graceful"하게 그려주기 위해 애썼다는 말이 당연하게 들렸을까.


  최근 눈에 들어온 캐릭터 역시 결말이 좋지 않다. 죄책감과 자신이 해온 일에 대한 회의에 휩싸여 사임하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난 아직 거기까지 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 생각을 하면 기분이 언짢아져서 볼 생각이 없어진다. 이건 중증이다. Stargate SG-1 때도, [스포일러]다니엘 잭슨이 떠난다는 사실 때문에, 다시 돌아온다는 걸 충분히 아는데도 5시즌에 들어서자마자 더 이상 진도를 못 빼고 있다. 마음을 이렇게 쏟는 건 좋은 증상이 아니다. 게다가 현실에서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가 어떻게 해서 쇼를 떠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주변 이야기가 좋지 못하면 - 대부분은 또 그렇다 - 겹으로 슬퍼진다.


  하긴 크리스 오웬스가 CSM의 젊은 시절을 연기한다는 드라마 내러티브 외적인 사실을 CSM의 아들이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인정받은 적 없는 스펜더의 캐릭터에 대한 내 애틋한 마음에 연결지어 위안이라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는 사람에게 뭘 바랄까마는ㅡㅡa;   (← 알아들을 수 있으면 이미 진 것. 흐흐)



  p.s. 지금 생각하니, 이런 마음자리를 가진 내가 어떻게 엑스파일 7시즌을 볼 수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볼 수조차 없었어야 맞을 것 같은데. 7시즌을 보기 시작할 때 나는 이미 8시즌 향방을 알고 있었다. 어떤 생각이었을까? 그 때에는?


Posted by Iphinoe

  ...Jump the Shark에서의 론건맨의 어이없는 죽음 (그리고 그 에피 자체가 그것만을 위해 쓰였다는 점), William에서의 스펜더 캐릭터의 추락이 내게 불러온 격한 분노 그 자체에 대해서는 다음에 정리해 보기로 하고, 오늘은 막 떠오른 생각인 '나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던 제프리 스펜더 캐릭터가 망가진 것에 왜 분개했는가'를 시도해 보겠다.


  일단 다른 분들께 그동안 말했던 내용을 다시 반복하면, 난 스펜더를 좋아는 안 할 망정 동정하고 안타깝게 생각했다. 이번에 스펜더 캐릭터의 망가짐에 쇼크먹고 그가 나타났던 예전 에피들을 돌려보다가 다시 확인한 사실인데, 내가 처음 이 캐릭터가 참 안됐다고 생각했던 것은 6시즌 The Red and the Black에서였다. 여기서 스펜더는 멀더의 권유로 퇴행 최면을 받은 스컬리를 일부러 X-files 사무실로까지 찾아와, 자신이 열한 살 때 찍은 퇴행 최면 테잎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용당하지 말라고 말한다.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말야...... 그 비디오를 보여주다니.)


  여기서 나는, 자신에게 치부이자 숨기고 싶은 (그리고 사실 출세에 지장받고 싶지 않다면 당연히 숨겨야 되는) 비밀인 그 테잎을 스컬리를 생각해 들고 와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스펜더가 본질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구나...하고 느꼈다. 그 전편 Patient X에서는 "인사고과나 걱정하며 어머니를 부끄러워하는(April Fool 님 표현)" 모습밖에 보지 못해서 그닥 인상이 좋지 않았는데, 이 행동에 나는 스펜더가 정말로 보통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본질적으로는 선한 사람이고, 욕심도 있고 남을 생각해 주는 마음도 있는 그런 지극히 평범한 사람 말이다.


  그리고 스펜더에 대한 내 동정심을 자극한 부분은, 그 테잎을 틀어주는 모습에서였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애써 냉담하게 보이려 하며 play 버튼을 누른다. 하지만 그리고는 화면이 나오자 방 한켠으로 가서 반쯤 뒤돌아서서 서류를 만지작거리다가, 화면 속 꼬마(자신)의 진술이 클라이막스에 이르자 불편한 표정으로 다가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화면을 꺼버린다.


  정말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 뒤에서 스펜더가 계속 멀더에게 딴지놓고 태클걸고 그의 일을 방해하고 스키너에게마저 방자하게 굴며 (요건 사실 참아주기 힘들었지만^^) 다닐 때에도 파울리만큼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하긴 파울리의 경우는 다른 이유들도 이만저만 많은 게 아니지만.)

  One Son에서 진실을 (자기 몫만큼의, 그가 자신의 입장을 확고하게 결정짓기 위해 필요했던 만큼의 진실. 하긴 그는 그 이상 더 알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알고 난 스펜더의 행동과 그에 뒤이은 담배맨의 '처벌' (물론 정말로 그 순간 제프리가 총에 맞아 죽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은 나를 상당히 가슴아프게 했다. 그는 결국 철저하게 이용당했고, 숨겨둔 진실을 몰랐기에 서서는 안될 편에 서 있었다. (연줄을 이용해 승진하려 한 건 여기서는 논외의 문제다.) 그리고 진실을 알고 나자 그는 신디케이트 손에서 놀아났던 것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을 느꼈고, 일어난 일에 책임을 지려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돌려놓으려 했다 (그는 M&S에게 X-files를 돌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목숨을 잃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나는 그가 담배맨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고는 한 순간도 생각하지 않았다. 1013 스타일이 그랬고 - 파울리의 석연찮은 회생, 담배맨의 수차례에 걸친 화려한 부활을 보라. 그는 파이널에서도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 , 기실 컨소시엄으로서는 스펜더를 죽일 필요도 없었다. 그를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그들 손끝에서 춤추는 인형으로 삼았을 때조차도 그들은 스펜더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삶의 목적이었던 야망을 잃었고, 그것을 뒷받침해줄 기반도 잃었다 (설사 FBI 내에 그대로 남아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았다 해도 그가 더 이상 관리자급의 관료로 승진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사태에 책임을 지고자 했다. 그것이 FBI 내에서의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모르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이건 이번에서야 One Son을 다시 보며 발견한 사실인데,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께로 가면서 스펜더는 멀더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도 그 잠시 동안 거의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얼마나 불쌍한가 말이다. 그는 자신이 수행한 역할도 거의 없는 일에 - M&S는 어떻든 그 학살을 결코 막지 못했을 것이다 -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끼고 벌을 받고자 했다. 이미 자기 방식대로 자기 자신을 처벌하고 있는 거다. 그 순간 멀더의 표정이... 부드럽긴 해도 스펜더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쓰지 않는 듯 무관심해 보여서 더 가슴아팠다. 그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유달리 냉담한 태도를 보인다. 크라이첵에 대한 멀더의 태도를 보라... 비록 그가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이긴 하지만, 결국 그걸 지시한 담배맨을 대하는 태도보다도 더 냉랭하다.)


  여기까지가 내가 이전에 해온 생각이고.. (물론 closure에서 내 동정심은 더해졌지만 그 이야기는 생략하고) 지금 막 든 생각은, 그러니까 유달리 스펜더에 대해 내가 그가 받을 만한 정도 이상의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스펜더가 너무나 평범한 보통 사람 (이게 맞는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이었기 때문에 역시 너무나 평범한 보통 사람인 나로서는 그의 캐릭터가 망가지는 것이 용납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동일시했다는 건 아니다. 공감? 그것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점이 작용한 것만은 확실하다.


  보통 사람 (음모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어찌보면 유일하게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친구다^^) 일 뿐 결코 악한은 아니었던 스펜더의 캐릭터를 완전히 망가뜨린 1013의 행위에는 정말 화가 치밀어오른다. 조연이라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캐릭터라고 아무렇게나 손 안에서 가지고 놀아도 된단 말인가? 팬들은 뭐냐! 스펜더 팬은 글쎄.. (안전하게 표현해서) 거의 없는 줄 알긴 하지만 싫다. 이 안을 DD가 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카터도 아닌 DD가 그랬다는 말에 정말로 얼떨떨해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DD에 대해 다른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만들어진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입장이 아니라 연기하는 입장이다 보니, 작가나 제작자와는 또 다른 자세로 접근할 것 같아서다.) 배신감을 느끼기에는 DD의 멀더를 너무나 좋아한다. 오, 데이빗, 아무리 흥미롭다지만-_- 대체 왜 그런 거야... 왜 그 불쌍한 사람에게 그 잔인한 짓을......



  (2002년 12월 18일)



  이 글에는 뱀발이 달려 있다

  이 일기 중간에다가도 덧붙였던 건데, William과 Jump the Shark를 보면서 제일 격분했던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조심스럽게 조금씩 쌓아올린, 캐릭터들에 대한 팬들의 애정을 1013이 너무나 가볍게 보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이게 소설도 아니고 비주얼이 함께 가는 드라마인데, 아가사 크리스티가 그랬던 것처럼 '나 손뗀 뒤 다른 사람들이 쓰는 것이 싫어서' 캐릭터를 함께 데리고 갈 필요도 없는 일 아닌가. 이런 생각 때문에, William을 보고 난 후, '제대로' 보기 위해 스포일러마저 기피했던 그 동안의 신조를 버리고 파이널을 미리 봐버리기로 결심했었다.

Posted by Iphin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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