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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본 삼국지 잡담

afterwards 2007. 4. 14. 20:02

  비본(秘本) 삼국지는 읽을 때마다 늘 팬픽션이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물론 내가 이걸 처음 읽었을 때는 팬픽션이라는 게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지만.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진순신의 진술 방식이 무척이나 간결하면서도 압축적이기 때문이다. 연의에서 힘을 주어 다루어왔을 극적인 부분들은 간단히 짚어주기만 하거나 아예 무시하고 넘어간다. 장판파에서 조운이 아두를 구출하는 극적인 장면이나, 서주에서 유비 삼형제가 모두 흩어졌을 때 관우가 적인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어 벌어진 강렬한 감정의 드라마(진국이다) 등등이 생략된 대표적인 장면들이고, 최소한의 사실 진술만이 이루어지는 예는 패장이 사로잡혀 자신의 거취를 결정해야 하는 대부분의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의 삼국지는 곧잘 의(義)를 지키려는 패장의 꼿꼿한 태도와 그런 태도를 아끼면서도 존중하는 승장의 마음을 한꺼번에 묶어서 극적으로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비본 삼국지는 그런 부분에서 머물러 지체하는 법이 거의 없다.


  그건, 어떻게 보면 연의를 읽어 이미 아는 사람들이 충분히 스스로 채울 수 있을 부분이다. 진순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른 데 있는 것이고, 진순신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충분하고도 남을 시간을 들이면서, 연의가 이미 그동안 다루어왔던 부분에서는 최소한의 언급만으로 바로 다음 장면으로 건너뛰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연의를 읽어 이미 익숙한 사람들, 특히 삼국지 전체의 전개를 대강이나마 파악하고 있는 독자들이 진순신의 타겟이 아니었나 싶다.


  진순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공개된 역사의 이면이다. 황건적의 난으로부터 시작하여 삼국지 중후반부의 세 세력인 조조, 유비, 손권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의 이름을 얻게 되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루는 1, 2권(번역본은 모두 다섯 권으로 출판되었다. 원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이야기의 맥락상 유사할 것으로 본다)의 주인공들은 무장들도 아니고, 그들 곁에서 그들을 보좌하는 모사들도 아니다. 난세 속에서 나름대로의 세력을 확립하고 종교적인 이상을 실천하고자 하는 종교인들이다.


  한 대 육구병이 도가의 가르침을 종교로서 전환할 수 있는 터전을 닦은 이래, 후한 말까지 크게 두 가지의 도교 계열 종파가 있었다. 하나가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태평도 교단이고, 다른 하나는 오두미도였다. 한편 후한 대에 서역을 통해 수입된 불교 또한 서역인들을 중심으로 조금씩 한인 사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황건적의 난으로 한 왕실의 몰락이 본격화된 상황 속에서, 오두미도 교단의 핵심 간부가 앞으로 닥쳐올 난세 속에서 백성들에게 구원이 되고 위안이 될 길을 찾기 위해 세상을 주유하면서 정보를 얻고 안목을 기르고 외래 종교인 불교와의 접촉을 통해 그들의 세계관에서 필요한 가르침을 추구하는 것이 2권까지의 주요 행보다.


  그러나(혹은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비본 삼국지는 '계략'에 집중한다. 그건 어쩌면 바둑 같다. 계산된 한 수 뒤에 숨어 있는 상대의 본심을 파악하고, 상대의 움직임을 미리 헤아려 복잡한 심리전을 펼치는 것이다. 이 경쟁에서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동정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도구인 것이다. 그런 점은 3권 이후로 접어들면서 본격화된다. 2권 중후반부에 이루어지는 조조와 오두미도의 교모(敎母) 간의 계약은 3권에서 조조와 유비가 맺는 계약과 중첩되면서, 우리가 아는 역사적 사실들의 뒤편에는 사실 다른 수많은 비밀스런 협정과 합의들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계약의 성격은 작게는 이 소설의 내용과 성격을 규정하는 흥미로운 창작품이다.


  그 모든 것이 반드시 사실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사실이어야 할 필요도 없고. 진순신은 역사적으로 드러난 결과를 가지고 관련 인물들의 동기를 훨씬 복잡하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했을 뿐이다. 이 소설의 어느 장에서건 일역을 담당하는 주요 인물들의 동기는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창작'이 가능했던 것에는 이 모든 사건이 몇 세기 전에 일어나서 작가가 이미 그 결말을 알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사실로 보기에는, 결과를 보고 끼워맞춘 느낌이 너무 강하다. 물론, 그건 이미 주어져 있는 텍스트를 가지고 장난을 쳤기 때문일 수도 있고, 연의/정사가 일부러 혹은 정보의 부족으로 눈감았던 사실들을 새로이 발굴하여 기존의 이야기에 맞게 자리를 찾아 주려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나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충분히 재미있으니까.^^ 그러나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을까?'라는 질문은 항상 사람들의 원초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2004. 09. 08)

Posted by Iphin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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