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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괴된 사나이 (알프레드 베스터, 김선형 옮김, 시공사, 2003)



  에스퍼는 제게는 언제나 흥미로운 존재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건 흥미진진하면서도 도덕적으로 모호하여, 결과적으로 강렬한 감정의 텃밭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보통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마음이 읽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때, 에스퍼가 느낄 순간순간의 충동과 유혹과 그만큼 강렬할 도덕적 갈등은 생각만 해도 아찔한 감정들의 기폭제죠. 엑스맨에서 개인적으로 진 그레이의 능력이 제일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런 모든 상상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이 설령 읽히고 있다 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파괴된 사나이'는 그 점에서 제 환상의 전제를 완전히 부수고 시작하는 사회를 만들었더군요. 이 사회에서 에스퍼의 존재는 공식화되어 있습니다. 잠재적 에스퍼들은 길드의 테스트를 거쳐 선택되어, 교육받고, 능력을 길러, 스스로의 능력에 따라 1, 2, 3급으로 나누어져 구분됩니다. 이 길드는 엄격하게 윤리적인 규약을 가지고 회원들을 통제하고, 그들이 기존 사회의 관습과 규칙에서 일탈하는 존재가 되지 않도록 행동의 제약을 가합니다. 에스퍼가 이미 사회 전반에 퍼져 있기 때문에, 설령 에스퍼라 해도 모두의 눈을 피해 불법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이윤을 도모하는 행위를 했을 경우 거의 반드시 적발되게 마련이라는군요. 범죄의 의도에서부터, 범죄 후 남는 감정까지 언제 어디서 그 어떤 에스퍼에게 들킬 지 모르기 때문에, 이 미래 사회는 강력범죄율이 현저히 낮은 사회로 그려집니다 (강력범죄가 아예 발생하지 않는다면, 수사 훈련을 제대로 받은 경찰 인력이 있을 리 없을 텐데, 수사진이 존재하는 걸로 보아 아주 없는 것 같지는 않더군요). 에스퍼들의 범죄는 법적인 처벌을 떠나서 길드에서의 축출이라는 처벌을 통해 이중으로 단속됩니다. 그들이 속하고 자라온 에스퍼 사회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수한 무언가 때문에 ㅡ 또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있으면 필연적으로 추방자를 짓눌러오는 고립감 때문에 ㅡ 회원들은 길드에서의 추방이라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런 제재 장치를 통해 에스퍼와 보통 사람들은 큰 차별 장치 없이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남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살인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배경이 이러한 미래 사회에서의 살인 사건이라면, 이 '어떻게'는 '어떻게 이 살인자는 살인을 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의도를 감출 수 있었으며 살인 후에는 자신의 범죄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은폐할 수 있었을까'로 해석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의 플롯은 두 가지 의미에서 다른 길을 걷더군요. 도서 미스테리인 이 소설이 범죄를 저지르기로 마음먹은 자가 어떻게 알리바이를 준비하고 자기 주변에 보호막을 구축해 가는가를 단계별로 따라가며 묘사하는 데다, 수사 과정 또한 좀더 고전적인 '어떻게'에 속하는 주제, 즉 '흉기는 무엇이었는가'와 '왜', 즉 '동기를 성립시킬 수 있는가'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작가 베스터는 에스퍼들이 사회의 주요 구성원인 사회에서의 범죄 수사와 재판이 사람들 뇌 속의 정보나 열심히 헤집어보는 내용으로 끝나게 하지 않기 위해 두 가지 장애물을 두었습니다. (물론 제 생각에 그렇다는 것이지요마는.^^) 하나는 에스퍼가 타인의 머릿속에서 읽어낸 내용은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지 않는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경/검찰에서 모든 증거에 대한 분석을 검토해 기소 가능 여부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라는 점입니다. 이 기계는 정황 증거나 심적 증거, 소위 말하는 '육감'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범죄의 구성 요소인 동기, 기회, 수단 이 세 가지 모두가 물적 증거로 뒷받침이 되어야만 사건이 기소 가능하다고 인정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수사를 지휘하는 파웰 경감(이던가요...책이 지금 옆에 없습니다;;)은 에스퍼의 능력으로 용의자의 머릿속을 헤집어보고 그가 범인임을 확신하고 있지만 그걸 뒷받침하는 증거를 모으는 과정에서 난관을 겪게 되고, 그게 수사 과정에서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물론 이런 점들을 읽고 있는 순간에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400페이지에 가까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삼키듯이 단번에 질주한 경험은 오랜만이었어요. 결말이 오기 전까지는 상쾌하고 기분좋은 전율만이 함께했습니다. 추적자와 사냥감은 서로의 존재와 능력을 넉넉히 알고 있고, 대결은 핑퐁처럼 경쾌하게 진행됩니다. 결말이 기대했던 것보다는 진부하여 심심했습니다만 그 정도만으로도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가지 남는 궁금증은, 만약 이 소설이 범죄 의도, 범죄 장면, 살인자를 모두 명백히 보여주고 추리의 전개를 보여주는 도서 미스테리가 아니었다면 소설 마지막에 탐정이 제시하는 '해설' 스토리를 과연 제가 전적으로 믿을 수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설명되지 않은 많은 결정적 부분들에 대한 해답(이를테면 동기)이 모두 에스퍼의 심리 분석을 통해 나오거든요. 물적 증거로서 정황적 뒷받침을 해주기는 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연결고리는 에스퍼들이 끼워맞춥니다. 그건 결국 심적 증거로서, 마치 포와로가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 중 이 사람만이 살인자의 심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살인자의 머릿속에서 이러저러한 사실을 '읽어냈다'는데, 독자로서는 반박할 수도 없을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베스터는 범죄가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하면서, 책을 주의깊게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품게 될 두 가지 의문을 놓아두었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저도 그 두 가지 단서를 모두 착실히 포착하고 그 이후의 스토리를 따라갈 수 있었는데요, 그 두 가지는 모두 책 마지막 부분에서 중요한 단서로 부각됩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제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고 따라서 작가의 의도를 따라갈 수 있었다는 사실에 즐거워했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왠지 속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 이 두 가지가 모두 위에 말씀드린 '심적 증거'와 연결되어 있다 보니, 베스터가 저 단서들을 일부러 잘 보라고 던져놓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수사가 이미 독자들이 의심을 품고 있던 방향으로 진행되어 결과로 나오면, 독자는 '당연했어!'라 생각하게 되는 게 아무래도 순리일 테니까요. 하여 조금은 뒷맛이 씁니다. 궁금하기도 하고요.



  (2004. 10. 11)



  * 휴고 상 첫 번째 수상작입니다.


Posted by Iphin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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