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J. Sansom'에 해당되는 글 1건


  영국사에서 튜더 왕조는 여러 모로 돋보이는 위치를 차지한다. 내전을 마무리짓고 근대의 거대 제국으로 거듭나는 기초를 세웠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같은 맥락에서 해양제국의 패권을 확보하여 수 세기에 이르는 번영을 위한 기반을 다져가는 시기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같은 시기 유럽사에서의 흐름과 발맞추어 영국의 종교적 전통을 수립하는 때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게다가 튜더 왕가 인물들의 개인사가 워낙 흥미진진하다 보니 대중의 관심을 받기에도 부족함이 없달까.


  유럽사의 맥락에서 보더라도 이 시기는 중요한 전환기다.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의 지도 안으로 들어와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하는 것도 이 때이고, 중세 이래 유럽을 지배해 온 로마 가톨릭이 그 전과는 다른 성격의 도전을 받으며 서양 기독교가 두 갈래로 쪼개진 것도 이 시기다. 그러나 튜더 왕조 아래 영국이 겪은 종교적 변화는 대륙에서의 흐름과 발맞추면서도 다른 양상으로 나아간다.


  그 다름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들어와서였지만, 헨리 8세가 수장령을 내려 교회를 왕권 아래 통합하기 시작한 이래 그 가능성은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16-7세기 영국의 종교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영국이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를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수도원의 죽음'은 정확히 이 시기를 다루고 있다.


  왕이 영국 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라 선언한 헨리 8세는 그동안 로마 교황청에 세금을 바쳐왔던 수도원들의 재정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수도원들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와 해산 작업에 착수한다. 이 와중에 한 지역 수도원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된 왕의 특사가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당시 왕의 재상 격이던 토머스 크롬웰은 주인공 매튜 샤들레이크를 보내 사건을 조사하게 한다. 샤들레이크는 특사를 죽인 것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임무와 함께 수도원을 압박해 원장으로 하여금 수도원을 헌납하도록 하게 하는 임무를 지고 파견되지만, 그는 종교적 개혁에 대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신체적 약점에서 출발하는 다름 때문에 권력 안에 있어도 밖에 있는 인물이다. 그는 수도원에서만 이방인인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도 이방인으로 존재하며, 그 때문에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소설은 샤들레이크의 시각을 따라가며 당시의 시대상과 이 시기를 규정짓는 많은 이슈들을 조명한다.


  샌섬이 풀어가는 이 이야기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한 배경과 주제와 공간을 빠짐없이 다루며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종교개혁이라는 큰 주제에 대한 고찰이 소설 전반에 걸쳐 흐르고, 수도원이라는 공간을 둘러싸고 있었을 법한 모습들에 대한 스케치도 다채롭게 펼쳐지며, 당대의 생활상은 물론이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직면했을 법한 종교적,윤리적,현실적인 이슈들도 짚어내는 데 상당한 비중을 할애한다. 좀 냉담자적인 쪽으로 치우쳤을지는 모르나 그거야 이 소설이 샤들레이크의 1인칭 서술이니 자연스런 노릇이다.


  인물화도 다채롭고, 그들을 묘사하는 방식도 성실한 편이다. 계층적으로만 다양한 것이 아니라 성별, 인종적으로도 당시의 시대상을 충실히 묘사하려는 듯 소소한 것까지 놓치지 않았다.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노력은 종종 역효과를 낳고는 하는데, 이 책도 도입부에서 신대륙을 통해 들어온 문물을 묘사할 때까지만 해도 그 함정에 잘해야 반은 빠지고 반은 피해간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했으나, 중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수도원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벗어나서도 중심을 유지하는 저력을 보인다.


  다양한 개인사를 지닌 등장인물들이 있지만 읽는 입장에서 가장 동화하기 쉬운 캐릭터는 역시 주인공 샤들레이크다. 이 소설이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기 때문이어서만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속내를 때로는 불편함을 인정하면서까지 정직하게 드러내어 독자들과 공유하기 때문이다. 강한 신념의 소유자가 아닌 회의하는 사람인 만큼, 공감하기도 무난하다. 천재형 탐정도 아니고 인생의 지혜를 자랑하는 원숙한 탐정도 아닌 그는 이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고, 나머지는 각자가 느끼고 줍는 만큼일 것이다.


  수도원에 일어날 변화의 단초가 핵심 배경이 되는 만큼 이 소설은 기존의 수도원이 어떤 문제를 담보한 곳이었는지를 밝히는 데에 인색하지 않고 그에 대해 분명 매우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만, 그만큼 이 시대에 첨예한 대립의 원인이 되었던 종교개혁이라는 이슈에 주목한다. 신념으로 일하는 사람들, 신념으로 반대하는 사람들, 오랜 세월 견고하게 우뚝 서 온 제도에 기대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 시스템이 뿌리깊게 자리잡은 사회를 바꾸려 하는 사람들, 다양한 모습이 스친다. 서로 반목하는 두 극단의 입장과 함께 그 모두에 냉소적일 수밖에 없는 민초들의 시각까지 포괄하고 있다. 한 가지만 하더라도 버거웠을 만한 일이지만, 그 둘이 깊이 맞물려 있으니만큼 샌섬은 두 가지를 모두 다루는 정공법을 선택했고, 그 결과는 썩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중세 말기의 풍속화와 근세 종교개혁기의 사상의 단초 두 가지를 모두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이 시대에 관심가진 사람들에게 일독을 추천하는 책이다.



  남은 이야기는, 그럼에도 내가 왜 이 책에 미적지근한 감정을 느끼는가에 대해서다. 해답이 정말 안 나는 문제 중의 하나였는데 아직까지도 만족스런 설명을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생각의 실마리가 두엇 정도 있고, 남은 분량으로는 그걸 이야기하고자 한다. 하나는 이 시기를 근본적으로 어떻게 해석하고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번역 또는 문체의 이슈이다.


  종교개혁기에 대한 해석이라는 이슈를 먼저 이야기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우선 엄청나게 거창한 문제고, 다음으로는 답이 안 나는 문제인 데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문제기 때문이다. 하나의 경향성을 지닌다고 모두가 인정하는 시기가 있다고 할 때 그 경향을 과연 무엇이라고 부를 것이냐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간단하게 끝나는 법이 없고, 그건 근세 유럽의 변동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16-7세기 유럽을 종교개혁기라고 부를 때 그 핵심을 무엇이라고 보느냐는 물음은 너무 커서 답이 안 나는 질문이고, 당연히 모든 개인의 의견이 저마다의 정당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 시기를 바라보는 샌섬의 시각은, 마지막에 모든 일을 보고 들은 한 인물이 남기고 떠나는 이야기에 방점이 찍힌 것을 볼 때, 그 인물의 견해에 가장 가깝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사실 더 정확한 표현은 샌섬이 자기 시각을 그의 입을 빌어 표현했다는 것이지만.) 바로 이 시기의 종교적 갈등은 인간 삶의 부조리, 신분과 계급, 불평등의 문제에 비추어 볼 때 비본질적인 권력다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작가가 감정이입하고 공감하고 교류한 쪽이 종교적 신념이 서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물론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 견해에 그다지 동의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이 문제가 내가 이 소설에 대해 유보적이게 만드는 데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행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별로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라는 말이지.) 다른 걸 다 떠나서, 작가가 이 이야기를 쓰는 와중에 어느 새 종교개혁가라고 묘사되는 부류의 사람들이 제일 변방으로 밀려나 버렸다는 내 느낌은 지극히 편파적인 것인지 아니면 나름 그럴싸한 것인지 판단을 못하겠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그보다는 좀 더 실증(?)적이고 좀 더 모호한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의 인물 묘사가 얄팍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그 원인이 무엇인지 머리를 굴려봐도 확고한 답을 알 수가 없다. 샌섬은 각각의 등장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데 공을 들였다. 그런 배려를 받은 캐릭터의 수는 하나 둘 정도가 아니다. 주인공은 물론이고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을 위시하여 수도원의 모든 인물, 심지어 실질적으로는 잠깐 등장하는 토머스 크롬웰까지 단선적인 인물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정확히 무엇이 모자라서 이 책에서의 인물 묘사가 스테레오타입이라고 느껴지게 하는 것인지, 생각하면 구체적이지가 않다. 통찰력의 깊이의 차이라고 한다면 말이야 간단하고 그럴싸하지만 실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고찰의 깊이가 딱히 모자라다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물론 대중소설에서 아주 깊이 들어갈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작가가 자신이 다루는 주제들을 가벼이 여긴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그래서 고민하게 되는 것이 문체라는 이슈다. 이 소설은 사실 플롯이나 시대상의 반영이라는 점에서나 흠잡을 데가 많지 않다. 그렇다 보니, 파고들어가다가 결국 캐릭터가 단순화되었다는 내 느낌이 설정이나 깊이의 문제라기보다는 전달의 문제, 즉 어떤 식으로 서술하느냐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의 문체의 문제는 번역의 어려움인가 싶은 것과 작가 자신의 경향인 듯한 것이 뒤섞여 있다. 외모를 묘사할 때 날카로운 눈매 운운하며 시작한다던지 하는 그런 부분들이 너무 판에 박혀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작가 자신의 경향이겠고, 번역의 어려움은 꼬박꼬박 등장하는 '종교개혁가'나 '교황 제도 지지' 같은 표현이 그 예가 되겠다. Reformer라는 단어는 '…가'라는 호칭으로 대칭될 수 있는 단어도 아니고, 그 가진 뜻을 그 이름으로 다 담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명사로 일대일 번역을 하기보다 형용사적으로 좀 더 부드럽게 고쳤으면 좀 낫지 않았을까 싶은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하다 보면 흐릿해져서 이게 과연 본질적인 문제인지 의심하게 된다.


  이 소설은 시리즈물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것은 아니라고 들었다. 그러나 어쨌든 시리즈화된 지금은, 두어 편을 더 읽는다면 지금의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이 시리즈가 토머스 크롬웰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를 좀 더 보고 나면 해답의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캐릭터가 흐릿한 것이 내게는 흥미로웠다. 내가 흐릿하다고 말한 것은 크롬웰의 동기가 불분명하게 나왔다는 뜻에서다 - 이런 거대한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 단 하나의 분명한 동기를 가지는 사람은 별로 없고 대개는 여러 가지 것이 얽혀들어 자기기만과 함께 근사한 추진력을 이루게 되는 것이 상례다. (그렇지 않다면 바로 fanatic이 되는 것이고 거기서부터는 보통 사람의 이해를 벗어난다.) 그 모습을 어떻게 그려내는지를 보고 나면 이 시리즈에 대한 전체 인상이 설 것 같다. 그러나 그럴 정도로 관심이 지대하냐 하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아직도 남은 얘기.


  1. 연쇄살인이라는 단어의 뜻을 아무래도 분명해 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이야기에서 살인이 여러 건 일어나긴 하지만 그것들이 연쇄살인은 아니었다. 다 지나고 보니 그렇더라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연쇄살인이라 부를 요소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건 용어 정의의 문제다.


  2. 책을 읽으려고 든 채로 승강기에 탔는데, 내 손가락이 '…의 죽음' 이 세 글자를 가리고 있었나 보다. 한 통로 사시는 다른 분이 승강기에 올랐다가 날 보시고 궁금하면 성당에 한 번 나와보라고 권하고 가시더군. 예의상 나머지 단어는 가르쳐드리지 못했다.


Posted by Iphinoe

사이드바 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