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릴 필요까진 없겠죠;;)
2002년부터 기다렸던 영화였으나, 시놉시스 보고 한 번 실망, 포스터들 보고 다시 한 번 실망, 예고편 보고 조금 기대, 스틸컷들 보고 다시 조금 더 기대, 개봉 후 솔솔 나도는 스포일러들을 접하고 다시 한 번 실망하여 아무 기대도 걸지 않은 상태에서 보러 갔다.
총평. 다른 무엇보다도 내게는 러닝타임이 너무 길었다. 영화가 캐릭터들의 감정에다 무게를 잔뜩 실어 내게 꾹꾹 눌러담아 오는 데다, 그게 비극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바로 헥토르가 죽는다는 것.
(이쯤에서 내 편견을 밝혀두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트로이 전쟁에 가담했던 수많은 영웅들 중에서 나는 헥토르에게 가장 끌린다. 게다가 이 지난했던 전쟁사에 대해서는 신화를 통해 얻은 백그라운드 지식이 조금 있고, 트로이 전쟁을 다룬 소설만 세 개를 읽었기 때문에 전혀 객관적인 관객이 아니다. 따라서 왜곡된 부분에 대한 내 시각이 전적으로 트로이에 동정적으로 흐를 수 있다는 건 미리 말씀드려야 공정할 것 같다.^^)
화면은 멋있었다. 난공불락의 요새로 헬라스 전역에 악명을 떨쳤던 트로이의 성벽이 재현된 모습만큼은 손색이 전혀 없었다. 무역으로 부를 쌓았던 트로이의 고급스러움이 그리스인들의 투박하고 간소한 살림살이와 대조되어 다가왔다. 그리스인들의 함대가 바다를 꽉 메우고 트로이로 다가오는 위협적인 장면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지중해다운 건조한 여름의 분위기가 좋았다.
압권은 역시 목마라고 할 수 있겠다. 스틸컷을 봤을 때는 사이즈가 너무 작고 지나치게 투박해 보여서 실망할 것이라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갔었는데, 의외로 보기 좋았다. 근처에 사람들이 서 있을 때 사이즈의 대비도 놀라웠고, 목마에서 그리스 군인들이 뚜껑을 열고는 줄을 내려 아래로 내려올 때 그림이 되었다.
전쟁신은 그 동안 많이 봐왔던 전쟁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로서는 자꾸 '반지의 제왕 : 두 개의 탑' 장면이 연상되어서 왠지 우습기도 했고. 아킬레스가 선보인 비껴 찌르기 전술은 위력적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우선 눈에 보기가 좋았더라.^^ 그리고 아폴로 병사대가 들고 다니는 달 모양의 방패도 인상적이었다.
음악... 음악은 정말 할 말이 없다. epic movie마다 오케스트라가 등장해 웅장한 듯 쓸데없이 감상적인 음악을 날리는 건 이제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웬만하면 엔딩 크레딧을 다 보고 일어났으련만 음악이 싫어서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나와버렸다. 제일 압권은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싸움 그리고 나중에 트로이가 함락당할 때 흐르는 노래. 음악이 많은 경우 관객들의 감정선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너무 감정을 들이부으려고 하면 듣는 사람이 튕겨나지 않는가 말이다.
스토리에 대해서는, 캐릭터에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점만 빼고는 각색을 효과적으로 했다. 신들을 정성으로 섬기고 그들의 권능을 믿는 트로이인들과 오직 인간의 힘을 믿는 아킬레스의 초인적인 능력을 끊임없이 상기시킨 것은, 내심 트로이 편인 내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었으나 스토리상으로는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양쪽에서 싸움을 직접 담당하는 두 축인 아킬레스와 헥토르 모두가 이 전쟁이 신의 능력과는 무관한 인간들의 싸움임을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대신들의 의상부터가 신정국가 냄새를 솔솔 풍기는 트로이를 무대로 설정한 것은, 사전 정보가 없는 관객들에게는 꽤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경험자가 아니다 보니 확언은 못하겠다;;
그리스 쪽에서는 아가멤논의 탐욕을 끊임없이 부각시켜 ㅡ 원래는 아가멤논만 탐욕스러웠던 것이 아니므로. 워낙이 느슨한 연합체제인 그리스가 10년이나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ㅡ 아킬레스와 대척점에 놓으려고 한 것 같은데, 아킬레스가 의외로 아무 생각이 없는 캐릭터가 되어버려서 대립에 날이 서기보다는 아가멤논이 괴물처럼 되어버렸다. 오디세우스는 작지 않은 비중임에도 예상 외로 기능적인 역할만이 부여되었다. 그의 생각이나 고민을 카메라가 따라가는 일은 단 한 번도 없고, 그는 영화 내내 언제나 그가 쓰여야 할 곳에 나타나 필요한 일들(아킬레우스 설득, 아가멤논 설득, 이런저런 제안)을 해주고 나면 다시 카메라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영화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모두 오디세우스가 담당한 것이 시사하듯, 이 상황에 대해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할 수 있고 그것에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캐릭터가 오디세우스다 보니, 스토리 밖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아킬레스가 아무 생각이 없다고 말한 것은 아킬레스의 캐릭터에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미 없는 전쟁에 나가 피를 흘리고 싶지 않은 것처럼 말하면서도 '후대에 명성을 길이 떨치게 될 것'이라는 유혹에는 마음을 빼앗기고, 자신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면서도 무언가 지킬 신념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아킬레스의 허무주의는 그의 폭력성과 나란히 잘 어울려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허무주의와 명성이라는 단어에 현혹되고 마는 모습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 아무리 영웅 중심으로 돌아가는 '인간적인' 전쟁 스토리라 해도, 후대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망이 그 무엇보다 강한 '인간적인' 욕망이라 해도, 아킬레스의 초인적인 능력은 그에게 늘 조금씩은 신성한 위치를 부여한다. (이 부분은 그리스 신화를 접한 내 편견의 영향일 지도 모른다.) 아킬레스와의 대결에서 죽게 될 것임을 잘 아는 헥토르가 가족들과의 작별에 긴 시간을 들이는 모습은 이 영화가 아킬레스에게 부여하고 싶어하는 이미지와 반신(半神)의 영웅 아킬레스라는 기존 이미지가 묘하게 맞물려 괴리를 일으키는 대표적인 예다. 헥토르의 양심이 아무리 죽을 것을 알면서 싸우러 나가고 싶어한다 하더라도, 프리아모스 왕이 군대를 이끄는 장이자 자신의 후계자인 아들에게 그걸 (알면서도) 허락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아무리 '정당한 싸움임을 믿을 때 가장 잘 싸운다' 하더라도.
일관성 없기로는 파리스 캐릭터도 뒤지지 않는다. 다만 파리스는 캐릭터 자체가 애초부터 일관성 없는 인물로 설정되었다고 본다 해도 크게 무리가 없기 때문에, 마지막에 뜬금없이 아킬레스를 죽이는 것만 빼면 불만이 크지는 않다. 어차피 아가멤논까지 트로이에서 죽여버린 마당에 아킬레스를 반드시 파리스가 죽여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파리스의 화살이 아킬레스의 발뒤꿈치에 박히는 장면은 아무 의미가 없는데도 신화가 전하는 바와 똑같이 연출해서 되려 실소를 유발했다. (신화에 따르면 불사신인 아킬레스의 유일한 약점이 발뒤꿈치라는데, 신의 개입을 애초부터 부정하고 시작한 영화에서 그런 '고증'을 지킨다는 것부터가 웃기는 일이다.^^) 트로이의 검을 (아무 자격도 능력도 없이 그저 나이든 아버지를 부축해 도망가기에 바쁜, 파리스로서는 이름조차 몰랐던) 아이네이아스에게 물려주는 장면도 황당하기 그지없었으나 그건 나름의 서비스 연출이라 생각하고 관대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브리세이스-아킬레스 스토리라인은 예상보다는 덜 기분나빴다. 아마도 폴릭세나의 성격을 브리세이스에게 섞어주어 프리아모스 왕의 인척으로 만든 뒤, 꽤 오랜 기간 동안 전투에 나서는 걸 거부한 아킬레스의 행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epic movie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로맨스를 추가한 것 같은데, 나쁘지 않았다. 중간에 아킬레스가 죽어버려서 관객들의 집중력을 흩어놓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므로, 트로이 함락 때까지는 그를 살려둬야 한다는 난제 또한 단박에 해결할 수 있는 꽤 좋은 각색이었다. 전형적인 감이 없지는 않지만, epic movie에서 그 정도의 전형성까지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리이므로.
그러나 아킬레스의 야수와도 같은 잔인함, 광폭함, 방향도 없고 목적도 없는, 한 마디로 도구에 불과한 폭력이 조금의 변명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정당화되고 어느 정도는 미화까지 될 수 있다는 건 상당한 놀라움이었다. 전체적으로 이 영화는 원래 신화보다도 더 남자들의 이야기라는 냄새를 풍기는데, 그건 상당 부분 아킬레스 캐릭터를 다룬 영화의 방식에 기인한다. 그 때문에 이 영화의 moral은 조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은 이 영화를 휴머니즘적인 시각에서 만들었다고 말하는데, 감독이 말하는 휴머니즘이 무엇인지 아주 모르는 바는 아니나,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그 휴머니즘만큼은 전혀 아닌 것 같다.
헥토르가 안드로마케와 아들을 살려 트로이 밖으로 탈출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안배하는 모습, 아킬레스와의 결전 직전 날 아들이 잠든 요람을 묵묵히 내려다보는 모습은 꽤 슬펐다. 겨우 두 살박이였던 헥토르의 후계자 역시 보복을 두려워한 그리스군에 의해 성벽 밖으로 집어던져졌다는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안드로마케는 노예로 끌려갔다 (누가 데려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영화에서 파리스/브리세이스/안드로마케/그 아들의 안위에 대해 가타부타 언급이 없는 것은, 트로이를 완전히 꽉 막힌 나라^^로 만든 각본가가 트로이에 대해 지킨 모종의 예의는 아니었나 싶은 느낌이다. 물론 내 편견이겠지.
덧붙임 - 이 영화에서 여자는 철저히 타자화되어 있다. 테티스부터 안드로마케, 헬레나까지, (어느 정도는 걸맞지 않게 이 전쟁의 히로인이 되어 버린) 브리세이스도. 너무 당연하게 불만이어서 언급하는 걸 까먹어버렸다.;;
덧붙임 II - 프리아모스 왕이 전쟁의 상황을 보기 위해 나와 앉는 모습을 보고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헐리우드 식 캐릭터 절약의 극치다. 프리아모스 옆의 의자에는 두 여인네들, 그러니까 안드로마케와 헬레네가 앉아 있다. 프리아모스의 며느리들이다. 그런데 전쟁 당시 사실 프리아모스는 부인이 멀쩡하게 살아 있었고, 딸들도 적어도 둘이나 있었다. 대단한 주인공주의다. ;-)
(2004. 0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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