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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마디로, 아기자기하고 유쾌하고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


  본 영화나 글의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합니다.;; 보실 분이 있으시다면 그 어떤 줄거리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제가 쓰는 줄거리는 제 입장에서 쓰는 거니까, '관객'을 오도할 가능성도 그만큼 높지 않겠어요^^ 게다가 전 별로 객관적인 관객도 아니거니와 전문적인 지식도 없는 시청자일 뿐이고요.


  그러나 이렇게 사설이 긴 것은 당연히 이 영화에 대해서는 줄거리를 이야기할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줄거리가 큰 의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줄거리 빼고는 할 이야기가 완전히 파편화되어 있어서요.^^;;


  많이 알려진 영화라면 굳이 이럴 이유가 없는데, 나름 소품인지라 별로 아시는 분들이 많지 않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기압인 날 깔끔하게 보실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 소개합니다. 보고 나면 이런저런 생각도 들게 되고요.


  일 주일쯤 전에 DVD로 빌려다 다시 봤는데, 다시 봐도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제목이 여러 가지 의미로 중의적이라는 것도 더 눈에 잘 들어왔고요. 아기자기한 면들이 한꺼번에 저를 덮쳐서 아주 유쾌했답니다.




  스토리.


  뉴욕의 어느 밤거리를 술에 잔뜩 취한 한 남자가 헤매고 다닙니다. 지나가던 행인은 중심을 못 잡고 거리 한쪽으로 쓰러져 버린 그를 노숙자로 착각해 먹던 햄버거를 쥐어주고 가기도 하죠. :) 한 술집으로 들어선 그는 바텐더와 왜 자기가 오밤중에 집에도 안 들어가고 술에 절어 거리를 헤매고 있는가에 대한 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뉴욕 토박이인 두 친구가 있는데, 하나는 카톨릭 신부고 다른 하나는 랍비입니다. 둘은 어렸을 때부터 내내 한 마을에 살던 단짝친구였지요. 유순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던 브라이언은 일찍부터 소명 의식과 함께 신부가 되기로 결심했고, 유태교 가정에서 자라난 제이크는 성격 좋고 뭐든지 잘 하는 학교의 스타였습니다. 그러나 둘이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 훨씬 이전인 초등학교 시절 둘은 한 여자아이를 알았답니다. :) 애나는 괄괄한 말괄량이였고, 의협심에 넘치고 선머슴아이같은 친구였어요. 셋은 애나가 아버지의 전근으로 캘리포니아로 떠나기 전 2년 동안 완전히 세 쌍둥이처럼 붙어다니며 잘 지냈었습니다. 애나가 떠난 이후 연락은 끊겼지만 남은 둘은 서로 다른 종교에 몸담기로 했음에도 단짝친구로 지냈고, 공부를 마친 후에는 둘 다 자라난 마을로 돌아와 그 곳 교구의 사제가 되고 랍비가 되었습니다.


  헥헥. 여기까지가 초반부 20분 안에 지나가는 '배경'입니다. 아, 배경 하나 더 남았군요.


  교황청에서 임명하는 카톨릭 사제는, 공무원처럼 스캔들이라도 나기 전에는 고정불변의 확고한 지위를 누립니다. 그러나 랍비는 마을 단위로 고용되어 오는 사람에 가깝기 때문에, 이사회에서 '저 랍비 마음에 안 든다'고 결정하면 그곳을 떠나야 하지요. 하여 브라이언은 이미 교구 사제로 임명받아 선배 신부의 지도와 편달 아래 안정된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반면, 제이크는 선임 랍비의 은퇴가 임박하자 일종의 '재신임' 과정을 거쳐야만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제이크가 주임 랍비가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꼭 필요한 게 있으니, 바로 아내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자는 자고로 회당을 총괄하는 랍비로 임명된 선례가 없다,는 것인데요, 따라서 제이크는 선임 랍비의 은퇴 이전에 결혼을 해야만 하고, 종교적 공동체의 특성답게 서로가 서로의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아는 속성상 제이크는 경매에 내놓은 매물처럼 이리저리 맞선 자리에 끌려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그리고 제이크는 자신이 한 명의 '남자'로서가 아니라 '랍비'로서 수많은 신부 후보감들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하죠.


  그 때 캘리포니아의 애나가 연락을 해옵니다. '병든 회사를 치료하는' 일을 맡아 하는 능력있는 커리어 우먼으로 성장한 애나가 뉴욕에서 얼마간 일을 맡게 되어 이쪽으로 오게 되었기에, 옛 친구들을 다시 보고 싶었다는 것이죠. 세 친구는 금세 다시 뭉쳐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어마어마한 실패로 끝난 제이크의 데이트, '하느님보다도 더 바쁘'다는 애나의 스케쥴과 쉴새없는 핸드폰 통화는 그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농담거리가 되고, 애나는 신부로서 금욕을 지키기로 서약한 브라이언의 결심에 대해서 궁금하기도 하고요.


  제이크의 또 한 번의 선을 도와주기 위해 애나와 브라이언은 연인으로 가장하고 더블 데이트에 나가는데, 내내 그 동안 서로에게 빠져 있던 제이크와 애나는 '때 빼고 광 낸' 데이트 자리에서 서로를 계속 의식하다 결국 그 날 이후로 비공식적인 데이트를 하게 되는데, 둘은 애나가 곧 돌아가야 한다는 점 그리고 랍비로서 제이크의 결혼이 간단치 않다는 점 등등을 고려하여 잠시 즐기는 관계로만 남기로 합니다. 그리고 둘은 브라이언이 '불편해할까봐' 이 사실을 비밀로 하죠.


  그러나 정작 브라이언은 애나에게 점점 애정을 느끼고 있었으니...


  짜잔. 여기서 끊겠습니다. ;) 궁금하시면 빌려보세요.




  사실 스토리 그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어법을 따르고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깔끔한 영화가 어떻게 끝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모두 다 잘 알고 있잖아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재밌고 귀엽고 아기자기하고 유쾌하지만, 심각하고 열렬하게 탐구되지는 않아도 로맨스가 발전하고 위기를 맞고 끝나는 사이에 파생되는 이야기들 그리고 그것들이 발을 담그고 지나가는 이런저런 문제들이 또한 아주 흥미롭습니다. 그것들은 크게 두 가지로 묶을 수 있는데, 하나는 제목이 말해주듯 faith 그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관계맺음의 문제. 영화 속에서 둘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Keeping the Faith는 문자 그대로 하면 '희망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내일 일이 잘 됐으면 좋겠어" / "믿음을 가져" 이런 식으로 쓰이지요. 하지만 사랑과 자신이 세운 서약 사이에서 갈등하는 브라이언의 입장에서 이 문장은 문자 그대로 '믿음을 지킬 것이냐'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faith가 '믿음'이라면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 이는 trust와도 어느 정도 연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제이크와 애나의 경우, 그리고 제이크와 이 회당을 둘러싼 유태인 공동체의 경우에 이 문제는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의 문제가 되죠. 특히나 랍비로서 자신이 이끄는 사람들에 대해 책임이 있고 의무가 있는 제이크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영화 속에서 제이크는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짚고 넘어갑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만큼 탐구되지는 않지만 애나의 캐릭터에 있어 숨겨진 동기와 갈등을 제공하는 문제인데, 바로 애나가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세속적인 캐릭터였다는 것이죠. 애나는 물론 밝고 착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공격적인 전문 경영인들의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강한 사람이기도 하고, 그런 만큼 애나의 세계는 그동안 기업들이 먹고 먹히는 생존 경쟁 속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던 겁니다. 자신이 거둔 성공이 충분히 자랑스러운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제이크와 브라이언이 공동체 속에서의 영적 생활을 추구하는 모습을 존경하는 만큼 애나는 알게 모르게 열등감을 느낍니다. 이 문제는 애나와 제이크가 크게 싸움을 벌일 때 터집니다. 제이크는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애나의 마음에 비수를 꽂죠. :)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건 이 영화 속에서는 religion으로서의 faith에 대한 이야기까지 함께 하고 있다는 겁니다. (faith를 갖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관한 브라이언의 설교는 그 한 예입니다.) 제이크와 브라이언은 모두 기존의 방식에 젖어 있는 유태인/카톨릭 공동체에 혁신을 가져오려는 사람들입니다. 그 혁신은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무관심해 일요일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 10명이 채 될까말까한 공동체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기도 하고, 한 믿음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믿음에 대해 이해하고 서로의 믿음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이크와 브라이언은 모두 서로의 예배에 참석하고 있고,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두 친구의 프로젝트는 카톨릭과 유태인들이 모두 함께 참여하는 쉼터, 일종의 클럽을 만드는 것입니다. (완고한 유태인 장로들을 바꾸려는 제이크가 정작 자기 어머니와 형 간의 종교적 불화에는 속수무책이라는 점은 재미있는 아이러니입니다. 특히 이 문제는 영화 내내 가장 큰 긴장 요인이거든요.)


  이 영화는 깔끔한 로맨틱 코미디이면서, 랍비와 카톨릭 사제를 등장시킨 유쾌한 농담이고 (실제로 이 영화의 아이디어는 작가 중 한 명이 서점에서 랍비와 신부에 대한 농담을 읽던 중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게 어떤 것이며 사람이 신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영화입니다. 아주 재밌었어요.




  그리고...

  1. 코드 3 DVD 오디오 코멘터리에는 자막이 없습니다;; 영어 자막이라도 있으면 급한 대로 켜놓고 보겠는데 그것도 없더군요. 학교 숙제로 지도 그리느라 밤중에 모니터에 종이 두 장 겹쳐 대고 삐뚤빼뚤 선 따라 지렁이 지나간 자국을 그리면서 들었습니다-_-;;


  2. 하버드 출신들에 대한 조롱조의 조크가 잠깐 지나갑니다. 각본 작업에 참여하고 감독/주연을 겸한 에드워드 노튼이 예일 출신이라 그런지 새삼스럽게 주의가 환기되더군요.


  3. 코멘터리에 나오는 재미있는 trivia인데요, 각본을 쓴 스튜어트 블룸버그와 감독 에드워드 노튼은 이 각본을 쓰는 내내 처음부터 벤 스틸러를 염두에 두고 있었대요. 그들은 아예 랍비 슈램의 이름을 벤으로 지어놓고 벤 슈램이라고 불렀답니다. 그러나 벤 스틸러가 이 역을 최종적으로 수락한 뒤에는, 스틸러가 자기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진 캐릭터를 연기하는 걸 싫어해서 이름을 바꿔야 했다는군요. 코멘터리 도중에 한 번 블룸버그가 제이크 슈램을 벤 슈램으로 잘못 불러요. :)


  4. 역시 코멘터리에서. faith를 갖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브라이언 신부의 설교는 실제로 어떤 주교가 한 설교라고 합니다. 실제 성당과 유태교 회당의 분위기를 알아보기 위해 취재차 여기저기 다니던 도중에 듣게 된 설교인데, 너무 좋아서 그 자리에서 받아적고 나중에 주교를 만나 그 내용을 쓰게 해달라고 설득했다고 합니다.


  5. 랍비는 평소에 따로 유태인들의 모자를 쓰고 다닌다거나 하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거의' 일반인처럼 보이지만, 신부는 그 신부복 칼라 때문에라도 눈에 띄잖아요. (요즘 신부님들은 그걸 평상복 차림일 때는 그걸 착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만.) 그 문제에 대한 농담도 영화 내내 나옵니다. 특히 두 번째 농담은 아주 재밌습니다. (역시 코멘터리에 따르면) 테스트 시사회 때 그 두 번째 농담이 나오자 관객들이 열광적인 박수로 화답해서, 그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 분위기 전환용으로 없던 신을 하나 넣어야 했다더군요.


  마지막. 이렇게 길게 쓸 마음이 꿈에도 없었는데 글이 기록적으로 길어졌습니다.;; 놀랍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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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 03. 20)


Posted by Iphin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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