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떠올리기만 하고 발전시키는 데 약하다는 게 내 문제인데, 이건 끈기보다는 소질의 문제다.
Anyhow, 폴 벤느의 책 중 그리스인들이 과연 신화를 진정으로 믿었던가 하는 문제에 천착한 책이 있다. 그 문제의식에서 시작하고 거기 집중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은 우리가 어떻게 현실을 인식하고, 서로 다른 물리법칙이 작동하는 것 같은 다른 세계관들과 어떻게 화해하고 그들을 한몸에 끌어안고 사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예로 말하자면 현대 물리학의 법칙에 기반해 우리 우주가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규정하고 예수가 죽은지 3일만에 무덤에서 되살아났다는 기적을 동시에 믿을 수 있느냐에 대한 얘기인 것.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나는 픽션의 세계에 있는 캐릭터들을 일면 내 이웃보다 가깝게 느끼고 있었고, 때문에 '결국 실제도 아닌 이야기에 왜 그렇게 마음을 쏟느냐'는 지적을 실제로 들어봤거나 아니라도 늘 의식하고 있었다. 저 책의 논의를 나는 내 멋대로 편의적으로 전용해 그런 내 성향을 정당화하는 데 써먹었던 것 같고, 덕분에 고마워하고 있다ㅡㅡ;;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니까 현실/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그것이 내가 그에 대해 감정을 느끼는 것에는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모든 감정은 그 자체로 진실이다. 하여 픽션과 현실을 기묘한 방식으로 섞는 나의 현실 감각은 이런 식으로 발전했다. 일단 정붙이게 된 캐릭터가 생기면 그를 둘러싸고 픽션적 현실이 생겨난다. 그에 대한 내 감정은 진실하다. 그리고 그 뒤로는 내 선호에 어긋나는 그 캐릭터의 행동은 작가와 제작진의 탓으로 돌린다. 매우 편리하긴 하지만 생각할수록 정신분열적인 현실 인식이다.
그런데 최근 정붙이는 픽션 캐릭터가 하나 또 늘면서 이게 내 정신건강에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특정 드라마^^에 대한 내 애정이 힘들었던 90년대를 버텨내는 데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 드라마에 몇 년 나왔다 사라지는 캐릭터들은 대부분 결말이 그다지 좋지 않다. The West Wing의 샘 시본의 경우 같은 건 매우 드물다. 오죽하면 소킨이 샘의 퇴장을 "graceful"하게 그려주기 위해 애썼다는 말이 당연하게 들렸을까.
최근 눈에 들어온 캐릭터 역시 결말이 좋지 않다. 죄책감과 자신이 해온 일에 대한 회의에 휩싸여 사임하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난 아직 거기까지 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 생각을 하면 기분이 언짢아져서 볼 생각이 없어진다. 이건 중증이다. Stargate SG-1 때도, [스포일러]다니엘 잭슨이 떠난다는 사실 때문에, 다시 돌아온다는 걸 충분히 아는데도 5시즌에 들어서자마자 더 이상 진도를 못 빼고 있다. 마음을 이렇게 쏟는 건 좋은 증상이 아니다. 게다가 현실에서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가 어떻게 해서 쇼를 떠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주변 이야기가 좋지 못하면 - 대부분은 또 그렇다 - 겹으로 슬퍼진다.
하긴 크리스 오웬스가 CSM의 젊은 시절을 연기한다는 드라마 내러티브 외적인 사실을 CSM의 아들이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인정받은 적 없는 스펜더의 캐릭터에 대한 내 애틋한 마음에 연결지어 위안이라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는 사람에게 뭘 바랄까마는ㅡㅡa; (← 알아들을 수 있으면 이미 진 것. 흐흐)
p.s. 지금 생각하니, 이런 마음자리를 가진 내가 어떻게 엑스파일 7시즌을 볼 수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볼 수조차 없었어야 맞을 것 같은데. 7시즌을 보기 시작할 때 나는 이미 8시즌 향방을 알고 있었다. 어떤 생각이었을까? 그 때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