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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즐겁게^^; 보는 영화다. 미국 대통령을 주인공 삼은 영화가 한때 몇 년 사이 꽤 나왔었는데, 이 영화는 명백한 악역 하나만을 빼놓고는 딱히 나쁜 사람도 없고, 영화가 끝나고 나면 딱히 피해본 사람도 없고, 긴박한 상황을 만드느라(그리고 영웅을 만드느라) 국제관계를 왜곡하거나 타자를 바보로 만드는 일도 거의 없는 시나리오였다. 주요 쟁점이 미 국내 문제였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이 봤을 때는 정치적인 성향이 꽤 강한 영화로 생각했을지 모르나,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얘기였다. (물론 공화당 입장을 충실히 반영한 영화였다면 상관이 있었을 것이다;-)


  내용 소개라면... 당선된 지 3년차, 이제 슬슬 재선을 준비해야 하는 백악관은 60퍼센트가 넘는 대통령 지지율을 바탕으로 범죄율 감소를 위한 법안을 추진해 재선 가도를 일찌감치 탄탄하게 닦아놓으려 한다. 그 와중에 환경 단체에선 그들이 추진 중인 화석 연료 감소 법안을 위해 전문 로비스트를 고용하고, 아내를 잃고 딸을 혼자 길러오던(?) 대통령은 이 로비스트를 보고 한눈에 반해 용기있게 데이트를 추진한다. 그러나 둘의 연애 행각(^^)이 매스컴의 초점이 되면서 보수적인 여론 때문에 지지율이 위협받자, 안전해 보였던 법안의 통과 가능성도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시나리오가 매우 치밀하게 쓰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참모진만 봐도, 맡은 직책이나 책임의 범위가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캐릭터상으로는 하나하나가 별도의 개성을 부여받고 나름의 뒷배경까지 구축되어 있다. 매우 귀여운 대통령(마이클 더글러스가 귀여워 보인 건 이 영화에서뿐이다)과 더 귀여운 대통령 따님,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답게 나사 하나 풀어놓은 듯 허둥대면서도 똑똑하고 예리한 로비스트, 진중하고 신뢰감을 주는 비서실장, 젊고 신념이 강한 참모 1(Michael J. Fox), 아는 거 많고 시니컬한 참모 2(안경 쓴 David Paymer), 역시 냉소적이지만 자기 업무에 충실한 대변인.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긴 해도 환경단체 쪽 사람들도 설득력 있게 그려져 있다. 이 때 했던 작업이 그대로 웨스트윙으로 이어진 게 아닌가 싶은데, 덕분에 지금 다시 보니 의도하지 않은 유머를 낳았다(이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언급).


  영화는 의도적으로 정당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기자들도 항상 '의회 다수당' '소수당'의 호칭을 사용하고, 대통령의 정적이 되는 상원 의원은 그냥 '보수당' 소속으로 불린다. 하지만 정책 성향으로 보아 현 행정부와 백악관은 영락없이 민주당이고, 반대편은 당연히 공화당이다. 로맨스 영화스러운 번역 제목을 달고 나왔고, 실제로도 로맨스가 핵심이긴 해도, 그 로맨스를 둘러싼 모든 요소는 워싱턴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 곳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심지어 연인들 간의 갈등도 거기서 발생한다. 이상주의자인 백악관 참모진의 모습이나 권력지향적인 반대쪽의 모습이나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타협을 통해 무언가 결과를 도출하려 하는 건 좋았다. 제목이 The American President인 건 제작진의 자신감의 표출이었나 싶은 생각도 해봤다. 매끈하게 잘 만든 영화다.


(여기서부터는 웨스트윙 보신 분만 아실 얘기)


  시나리오 작가 Aaron Sorkin이 웨스트 윙의 제작자인 그 Aaron Sorkin이라는 사실을 알고 보니 웨스트 윙의 프리퀼을 보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유사점이 많아, 로맨스를 다루지 않는 나머지 부분에서 계속 키득키득 웃으면서 봤다. 학자 출신의 대통령은 영화에선 역사학자였고 드라마에선 경제학과 교수였지만, 두 사람의 유머 코드는 매우 비슷하다. 얘기하고 싶지 않은 주제는 살살 돌려 비껴가면서 화제를 자기가 원하는 식으로 이끌어가는 방식도 비슷하다. 하필 웨스트윙의 대통령 역을 맡은 Martin Sheen이 이 영화에선 백악관의 2인자 비서실장으로 나와서, 초반부에 Sheen이 대사칠 때마다 대통령의 발언인 것 같아 심히 헷갈렸다. Sheen의 연기 스타일이 나중에 대통령을 연기할 때도 그대로기 때문에... 비서실장이 대통령의 오랜 친구이며 그가 사적으로도 매우 의지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비슷하다. 강한 신념으로 타협을 싫어하고 일을 밀어붙이는 스타일인 루이스(Michael J. Fox가 연기한)은 Josh하고 비슷해 보였고(Josh는 대통령의 연설문을 쓰지 않지만, 그걸 빼면 하는 일의 범위도 똑같다), 불쑥 나타나 질문에 대답하고 사라지는 백과사전형 캐릭터 레온은 그 박식함 못지않게 냉소적인 태도까지도 Toby하고 완전 닮았다. Toby는 레온처럼 사위를 못 살피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찌나 웃기던지^-^


  클린턴이 모델이라는 Primary Colors도 재미있게 봤었지만, 일상성에 더 강한 이 영화가 평소에 부담없이 보기에는 더 잘 맞지 싶다. 그리고 Michael J. Fox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사실 이 영화는 처음 그 때문에 봤었다.



  (2005. 08. 19)
Posted by Iphin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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