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조국 (1992)
로버트 해리스 / 김홍래 역
랜덤하우스 (2006)
어떤 기대를 갖고 책을 집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교묘하게 현재 내게 필요했던 바와 맞아떨어지는 이야기였다.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독일은 동유럽을 제외한 유럽의 대부분을 거대 유럽 연합으로 묶어 자국의 우산 아래 둔다. 동유럽 전선에선 아직 소모전이 계속되지만 미국과 독일은 냉전 체제로 들어가고, 20여년이 지난 64년에 이르러 국면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제 두 나라는 데탕트의 기치를 내걸고 정상회담을 준비한다.
이 이야기가 추리소설이 되고 보니,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는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대개는 근사치에 가까운 답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생각을 해보진 않았다). 도입부를 조금 읽다 보면 관건이 되는 음모가 무엇인지 밝혀질 비밀이 무엇인지, 이들이 모르는 것이 무엇이고 아는 것이 무엇인지도 대충 파악이 되고. 그걸 풀어나가는 방식이 중요한 것이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닌 것이다. 역사대체소설이 주는 모종의 편안함은 그런 데서 나온다. 그럴 마음이 없다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이다.
수동적으로 이 이야기를 읽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나, 제 2차 세계 대전 또는 나치 독일에 대한 지식이 평균 이상인 사람이라면 실제 인물과 사건들의 후일담을 작가가 어떤 식으로 그려나가는지, 자기 자신이 갖고 있던 이미지와 어떻게 합치되고 어긋나는지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으리라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는 보통 퍼즐추리조차도 게으르게 읽는 사람이고 (트릭 있으면 걸려들고 진상이 밝혀지면 감탄한다), 최근은 그런 경향이 더 심해져 있기 때문에, 다른 부분에서 얻는 흥미와 재미로도 차고 넘쳤다.
내게 이 소설의 재미=_=와 가치는 나치 독트린이 사회 전역에 걸쳐 지배적인 헤게모니를 차지한 사회를 실질적으로 구현했다는 것이다. 20년이라면 시스템은 정착할 기회를 얻는다. 전쟁이 일상이 되거나 아니면 일상이 전쟁을 비켜날 수 있었다면 더더군다나 그렇다. (이 소설은 후자다.) 총통 개인에 대한 신격화 노래가 학교 점심 시간에 일상적으로 불리는 것도 한국에서 그리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1984'와 '나치 시대의 일상사'를 합쳐놓은 것 같은 분위기라는 느낌을 받았다. 경찰국가에 대한 비교적 세세한 묘사도 주의를 끌었다. 경찰이 세 계급으로 나뉘어 업무를 나눠 갖는 방식이라든지, 그들 사이에 서열이 있긴 하지만 반목과 경쟁이 존재한다든지 하는 눈에 띄는 것들부터 시작해 도청을 비롯한 대중 감시가 일상화된 시대의 풍경과 그런 환경과 집단적 사고 속에 개인들이 어떤 식으로 적응해 가는가 하는 것도. 주목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소소하게 스쳐 지나간다.
그에 대한 까발림이 다른 것도 아니고 서류 더미 사이에서의 탐색으로 시작한다는 내용은 내가 예상치 못했던 류의 필요 충족이었다. (다른 것도 애초에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때문에 베를린 기록문서보관소에 대한 그리고 그 안에서의 일에 대한 묘사는 은근히 재미있었다.
이 이야기의 미스테리가 무엇으로 밝혀질지 알아듣게 되고부터는 결말의 모양새가 조금씩 궁금해지기 시작했는데 - 해피엔딩일 것인가 아닌가 - 그런 점에서는 좀 너무 모범적이었다.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투덜거림이고, 사실 그렇다 해서 불만이라던가 아쉽다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다. 그저 조금만 다르게 나갔더라도 나쁘지 않았을 거라는 정도일까.
해서 여운이 남는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몰입해 읽었고 덕분에 만족스러웠다.
p.s. 문서보관소에 가본 적이 있다. 엑스파일 파일럿과 리덕스에 나오는 펜타곤 기밀자료 보관/은닉소만한 규모는 절대 아니고, 작고 소박한(사실 소박하진 않은지도;;) 사설 보관소. 꽤 재미있는 곳이었다.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 서류들이 분류에 따라 규격화된 문서함에 넣어져 책장을 따라 줄세워져 있다. 인쇄된 것도 있고, 손글씨로 작성된 것들도 있다. 공적인 문서와 사적인 문서가 혼재한다. 묘한 느낌을 받았고 주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