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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소사

카테고리 없음 2015. 4. 9. 01:55


Dexter 피날레를 봤었다. 역시 우리를 미치게 하는 건 그런 감정들이지.



그리고 피터 디킨슨의 One Foot in the Grave를 읽을까 하고 초반부 다섯 장(chapter가 아니다! 10 pages)쯤 보다 나머지는 유인책 삼아 남겨두었다. 다섯 장 내내 다스려지지 않는 자기 몸을 다스려 가며 옷을 입으려고 애쓰는 피블의 모습을 그려보고 있자니 너무 힘들어서. 나이가 들어 몸이 쇠퇴하면서 정신도 같이 쇠퇴하는 경우가 있고 아닌 경우가 있는데, 전자가 덜 슬프다는 것은 아니지만 후자의 경우는 본인이 정말 괴로워지기 때문에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을 이끌고 옷을 갈아입는 것 같이 사소한 - 물론 뇌졸중에서 회복 중인 고령의 환자에게는 절대 사소한 게 아니다 - 행위를 그렇게 집요하게 묘사하는 걸 읽는 데는 굉장한 인내가 필요하다. 현재 내게는 그런 인내심도 없고, 그런 경험과의 간접적인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좀 초연해지기도 힘들다. 그리고 애초에 우리글로도 묘사는 집중이 잘 안 되는데――;


그래서 나머지는 좀 남겨두었다. 읽을 날 오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오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말 나왔으니 말인데, The Lizard in the Cup 바로 다음이 이 작품인데, 작가들 중에는 캐릭터에게 그리 감정적으로 매여 있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거 잘 알긴 하지만 시리즈물이 매우 흔한 추리소설판(?)에서는 캐릭터가 작품마다 어떻게 변화해 가는가도 꽤 큰 주제인데, 등떠밀려 은퇴함 → 바로 다음 작품에서 아내는 이미 죽고 본인은 뇌졸중으로 요양원행이라니 내가 다 슬프다. 물론 그 배경 세팅에 호기심이 일어 구해 둔 것이긴 한데, 그래도 좀 너무하잖아=_=; 제목부터가 좀=_=;. 근데 피블이 등장하는 작품 수가 몇 편이나 되지? 분명 예전에 찾아볼 때 체크하긴 했을 텐데, 다 잊어버렸다.



문장을 한정없이 늘여쓰는 버릇을 고쳐야 하는데.


Posted by Iphinoe


  Thanassi Thanatos (tycoon from Sleep) invites him to Greek Island hideout to play role of Mafia in war-game style simulation of business opponents' likely actions. Pibble suggests elimination of Thanatos himself and then investigates the possibility for real.


  피터 디킨슨 공식사이트의 저작 목록에 나오는 이 책의 줄거리 소개는 이러하다. 너무 잘 써놓아서 더 할 말이 없다. 직접 읽어보실 분이시라면 이 아래는 읽지 않으셔도 무방할 것이다. 전에 두 번 정도 시도했다 실패한 적이 있는 소설이었는데 ― 처음 두 쪽을 넘어서지도 못했다 ― 이번에는 그 난관을 비교적 쉽게 넘었고, 그러고 나니 설명도 친절하게 잘 되어 있고 plot twist도 없어서 어렵지 않게 적당히 읽혔다. 배경 세팅이 좀 재밌는데, 일어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사건으로부터 거물 한 사람을 보호하는 이야기이다.






  나는 피터 디킨슨을 아동문학의 작가로서만 접했었다. 해서 The Lizard in the Cup을 대하는 내 가장 큰 감정은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아동문학 작가로서 내가 본 (혹은 좋아하는) 피터 디킨슨은 강한 신화적 분위기를 구사하는 사람이었고, 그 위에서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요리했다. 계시와 신적 권능, 신과 인간과의 관계,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기 시작하는 시기의 동요와 갈등과 대립, 변화의 동력으로서의 전쟁 등등. 매우 전형적인 만큼 제대로 다루면 폭발력이 센데, 그가 그러했다. 그 신화적인 분위기의 아우라가 매우 영향력이 강했고 길게 남았었기 때문에, 디킨슨의 추리소설은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꽤 궁금했다.



  이 소설의 무대는 그리스의 한 섬이다. 전형적인 여름 휴양지로, 주요 등장 인물도 몇을 빼면 죄다 외지인이다. 이들은 전직 경찰 간부에 은거 중인 테러리스트, 정보부 소속의 살인 면허를 지닌 요원, 거부와 그의 가신 그룹으로, 도무지 범상치가 않다. 아무튼 일상적인 풍경은 아닌 것이다.


  시점을 조율하고 우리에게 시선을 제공하는 주인공인 피블은 이 거부를 둘러싼 주변 그룹에 최근 어울리게 된 사람이다. 그는 이미 두어 번 그의 호의를 입은 몸이며, 아직까지는 손님으로 대우받고 있지만 문턱에 서 있는 거나 다름없는 위치이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벌써 타나토스가 부리는 사람들 중의 하나고, 스스로도 그와 같은 사실과 위치를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다. 피블은 이 독특한 위치에서 이 그룹의 다이나믹을 관찰하지만, 독립적인 관찰자가 아니며 그 또한 그에 좌우되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기 때문에, 그의 시선은 거리두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스코틀랜드 야드에서 일하다 퇴직한 사람으로 (경찰에서 어떤 계급으로 일했는지 궁금했는데 책 속에서는 도무지 언급이 없어 좀 혼란스러웠다. 다른 작품 소개를 읽어보니 총경으로 퇴직한 듯) 사적으로 아는 사이인 거물 사업가 타나토스로부터의 호출 겸 초대에 응하여 그리스의 한 섬, Hyos로 온다. 어떤 다른 지역에서 타나토스가 보스톤 마피아와 손잡은 기업가들의 이권에 반하는 짓을 했고, 그와 그의 주변인들은 보스톤 쪽에서 그에 대해 어떤 보복 조치를 취해 올 것인가의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피블은 갑작스런 사고로 올 수 없게 된 그 그룹의 한 사람을 대신하여 마피아 쪽의 시각을 제공해주기 위해 그 자리에 참석한다.


  이 회의에서는 이 전체적인 구도에 대한 소개와 함께 두 가지가 드러난다. 하나는 앞으로의 이야기에 원동력이 되는 타나토스 암살 시도에 대한 언급이다. 다름아닌 피블이 마피아 측의 역을 맡아 브레인스토밍을 하다 떠올린 아이디어다. 웃어넘기는 사람들도 있고 그 자신도 그 가능성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상대편이 그러한 공격을 감행할 가능성이 만에 하나라도 있다면 그에 대비를 해두는 게 나쁠 것은 없다는 것이다. 타나토스도 그에 동의하고, 임무를 나눈다. 이 섬에 세워진 타나토스의 여름 별장은 (당연하지만) 해변을 끼고 있어서, 물에서의 공격에 대해서는 타나토스의 배와 본토에서 보내져 올 경호원들이 책임지기로 하고, 피블에게는 섬의 안팎을 살펴 외부인 ― 즉 마피아에서 보낸 hit-man ― 의 접근을 알아보는 임무가 맡겨진다.


  섬의 나머지는 외지인들이 들어와 정착한 남쪽 빌라촌과, 가난한 원주민들이 땅을 일구고 고기를 잡으면서 사는 마을, 절벽 끝에 지어진 수도원 정도로 나뉘어 있다. 이 수도원은 수도사들이 은둔하기 위해 몇백 년에 걸쳐 조금씩 넓혀 나간 공간으로, 현재는 쇠락하여 두 명의 수도승만이 지키는 곳이다. 이 수도원은 디킨슨이 꽤나 공들여 묘사하는 장소인데, 비슷한 수도원들을 TV 여행 프로그램을 통해 본 것이 전부인 나도 왜 이 수도원과 그 속에 위치한 동굴에 대한 서술이 이 소설에서 그렇게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알 것 같다. 플롯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걸 떠나 상상력을 자극하고 독특한 느낌을 안겨주는 꽤나 비현실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람도 떠나고 세월에 퇴색하여 몰락해 가던 수도원은, 최근 부당하게 징발되었던 땅을 합법적으로 돌려받으면서 갑자기 부유해져 복원 사업을 나름 거창하게 벌이고 있는 와중이다. 이미 이 섬에 호텔을 하나 지어놓고 있는 타나토스는 수도원을 관광 상품 겸 호텔로 개발하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는 터였다. 이 두 수도승들은 타나토스의 표현에 따르면 술독에 빠져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순 사기꾼들인데, 예전에 밀수를 위해 쓰던 나루가 하나 남아 있어 피블의 조사 대상이 된다. 피블은 수도원에 올라갔다가 현지인들과 얽히게 되고, 그 와중에 거기서 수도사들이 성화 그려 파는 걸 돕는 일로 살고 있는 낸시라는 영국 여자와도 안면을 튼다.


  이 조사 와중에 피블은 바로 전날 이 섬에 도착한 외부인과 마주친다. 그는 무려 헬기를 타고 섬 호텔에 도착했고, 그 때문에 섬 주민들의 이목을 있는 대로 끈 상태다. 피블은 그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보았고, 상대 역시 그를 알아보고 접선을 제의해 온다. 버틀러라는 이름의 이 인물은 정부의 비밀 요원으로 살인 면허를 가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피블은 아직까지는 그와 말을 깊이 섞어본 일이 없고 그를 잘 알지도 못하는 터다. 버틀러는 다음날 피블과 섬 외딴 장소에서 만나, 상부에서 이 섬을 마피아들의 마약 제조 중간기지쯤으로 의심하고 있다면서 조사를 좀 도와달라고 부탁해 온다. 피블은 그가 과연 진실을 말하고는 있는지 의심하는 한편 버틀러가 조사한다는 사건과 타나토스에 대한 위협(있다면)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어쩌면 버틀러가 마피아에서 보낸 암살자일 수도 있는 데다, 타나토스 역시 언제나 합법적인 방법만 동원해 온 인물은 아니고, 그의 친구이자 부하들의 그에 대한 헌신은 법의 경계를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피블은 타나토스와 그 주변인들의 다이나믹을 종종 유럽 궁정에 비유해 생각한다. 개인적인 헌신과 집단적인 결속으로 맺어진 이들의 수직적이면서도 애정을 담보한 관계는, 그 속에 있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이 피블의 발언인데, 피블 역시 이 속에 끌려들어가고 싶지 않아 하면서도 드러내 놓고 거절하지는 못한다. 앞서 말한, 원탁회의 씬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가능성은 낮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물리적 공격에 대비해 지역 경찰의 협조를 받자는 것이 피블의 맨 처음 의견에 대해 타나토스는 단칼에 거부한다. 그리고 이어 묻는다. "You still want to help?" 피블은 모두의 강렬한 시선을 대면한다. 책에 나온 바대로, 이는 '네 능력으로는 감당 못할 규모의 휴가 비용을 누가 지불해 주었던가'의 물음이 아니라 '누굴 신뢰하는가? 무엇/누구에 충성하지? 네 친구들이 누구냐?'의 물음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설의 핵심 주제인 loyalty로, 이 소설은 어떠한 개인 또는 조직에 대한 헌신이라는 것의 무게, 그 의미, 주변의 압력, 그게 담보하는 애정, 그리고 그 속에서의 물고 물리는 관계 ― 즉 정치역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피블은 평생 몸바쳐 일했던 경찰청에서 해고당하다시피 물러난 위치이고, 같은 대상(나라)을 위해 뛰고 있는 비밀 요원은 자신의 조직과 동료, 이념에 대해 회의하고 있다. 피블은 한 개인에 대한 사적인 헌신과 충성으로 맺어진 그룹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그 스스로도 반 정도는 이미 거기 발이 빠진 상태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기대에 거부감을 느끼고 한편으로는 그 병리적인 역학관계를 좋아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그 기대에 부응하는 태도를 취하고 그에 맞게 행동한다.


  그러나 그러한 단단한 결속은 평등한 관계와는 거리가 멀다. 각자가 타나토스에 종속적일 수밖에 없는 이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탄생하는 부정적인 감정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은 심지가 굳고 자신의 신념이 다른 데 있는, 그러나 현재는 타나토스의 여자로 그의 옆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는 정부뿐이다. 토니라 불리는 이 여자는 누구도 거기서 자유롭지 못할 만큼 강력한 매력과 영향력을 주위에 뿌리고, 타나토스의 시혜를 받는 입장에서도 그에 대해 독립적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다른 인물들은 타나토스의 무게에 휘둘리고, 그러면서도 독자적인 개인으로 남으려 애쓴다.


  그리고 때로는 다름아닌 타나토스 자신이 그런 주변인들의 충성심을 극한까지 내몰아 시험하곤 한다. 그런 일이 피블이 있을 때 한 번 빚어지는데, 바로 토니가 타나토스와 결별하고 떠나면서다. 타나토스는 그 날 오후와 저녁 내내 '친구들'을 조롱하고 놀려대고 괴롭히고, 그들은 번갈아 가며 그 분노의 과녁이 되어준다. 피블 역시 마찬가지인데, 실질적으로는 이 ritual 이후로 그들이 피블을 '우리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피블도 그러했느냐 하면 그것은 다른 문제다.




  피블은 타나토스를 위해 낸시의 안내를 받아 사람들을 만나고 섬을 조사하는 한편, 버틀러의 부탁을 받아서는 타나토스의 집과 배를 수색해 마약의 제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근거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버틀러에게 전해준다. 그러나 그는 버틀러의 정체와 그가 여기 온 목적을 타나토스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지만, 타나토스 쪽의 이야기는 버틀러에게 완전히 까놓지 않는다.


  모두가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아주 매우 몹시도 낮다고 했던 암살 시나리오는, 그러나 암살 기도가 실제로 일어난 듯 보이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타나토스와 다른 한 명이 수상스키를 타던 중에 갑자기 불이 붙어 배가 가라앉은 것이다. 그 다른 한 명이 운전 중에 갑자기 연료탱크에 총구멍이 나는 것을 보았다고 했고, 다른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만에 하나에 대비하기 위해 가라앉을 배를 건져서 연료탱크를 확인해 보기로 한다. 토니가 떠나면서 타나토스와 그 주변인들이 겪은 소동은 피블이 다시 찾아간 수도원에서 시선을 끄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버틀러가 타나토스 그룹 내부에서 나온 제보 때문에 지역 경찰에 체포되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피블은 구도를 단순화하기 위해 버틀러를 섬에서 치워버리려고 하고, 그동안 알아낸 모든 사실을 총동원해 일을 매듭짓지만,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피블이 떠나는 날, 비행장으로 나가는 피블을 배웅하기 위해 해변의 술집에서 모두는 잔을 들지만, 예고없이 총격이 시작되고 두 명이 쓰러진다. 목격자로서 경찰서에서 진술을 하는 피블은 진상을 깨닫고 사건을 정리하는 입장이지만, 이미 모든 것은 너무 늦었다. 경찰과 피블, 그리고 옆 섬에서 불려온 통역자 사이에서 에필로그가 되는 것은 이 작품의 제목인 지역 전설에 대한 이야기이다.


  피블이 그 전설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낸시를 통해서이다. 이 지역 주민들은 위생에 그리 신경쓰는 사람들이 아닌데, 그 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만한 두 수도사도 음식과 물만큼은 신경써서 꼼꼼하게 덮어놓고 지내는 모습을 본 피블이 그에 대해 언급하자 낸시는 Samimithi라는 도마뱀 이야기를 한다. 이 섬에는 그 도마뱀이 음식이나 음료수 위로 지나가면 그 음식이나 물이 독을 지니게 되어 먹으면 탈이 나거나 죽는다는 전설이 있다는 것이다. 그 후로 피블은 때떄로 섬에서 이 도마뱀의 모습을 목격하곤 하는데, 타나토스가 자기 우산 아래 전직 테러리스트 하나를 불러들여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버틀러에게 말해야 할 것인가를 피블이 고민할 때, 그는 이 도마뱀을 생각한다. 우정의 컵 안에 도사리고 있는 독. 토니의 매혹에 피블이 휘둘리고 있던 탓에 때떄로 터져나오는 고민들에 이 전설이 섞였지만, 결말에 엮여 이야기가 여기까지 오면 스포일러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의 기분은 흡사 무언가에 얻어맞은 느낌이다. 새로운 주제는 아닌데 뒷맛이 묵직했다. 전달이 좋았다는 뜻일 것이다. 최근에 무언가를 열망한다는 것과 자존심 또는 자존감의 문제를 결부시켜 생각케 했던 일이 있어 흡수도 더 잘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크게 오락적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해서 심오한 사색이 담겨 있다고 할 것은 아니고, 일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의 일상적이지 않은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소설이지만 깜짝 놀랄 만큼 좋은 작품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의외였다. 주변에 추천할 생각은 꿈에도 없지만, 이 작가를 좀 더 찾아 읽게는 될 것 같다.






  남은 얘기 하나. 전체적으로 유머가 많지 않은 작품이나, 가끔 큰 웃음 주시는 대목이 있어 유쾌한 전환이 되었다. 그 중 하나는 '디킨슨 영감 뜬금없이 웃겨주시네'라 생각하다 뒤에 가서 이해한 대목도 있긴 한데 그건 설명할 자신이 없어 넘어가고, 타나토스가 수도원의 두 수도승들에 대해 평한 것이 재미있었다. 이 수도사들이 밀수에 전문가들이라면서 타나토스는, 그들이 죽어서 천국에 간다면 밀수로 들어갔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방금 이 대목에 웃지 않으셨다면 그건 전달자 탓이다.-.ㅡ


  얘기 둘. 그리스어를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하지 못하는 피블은 타지를 여행한다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그쪽 언어를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묘한 수치심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일상에 섞여들 수 없고 그냥 물과 기름같은 존재가 되는 여행자라는 위치에 대해. 이 역시, 비슷하다고는 못해도 그에 걸친 경험을 했었던 터라 이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얘기 셋. 이건 이 책을 읽으면 누구나 동의할 이야기인데, 책을 읽으면서는 물론이고 읽고 나서도 피블에 대해서는 별 감정이 없고, 버틀러가 좋아지려고 한다. 이건 첫 번째 남은 얘기와 연관이 있어서 써놓긴 해도 이해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잖아도 이 친구 어딘가 오프비트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 그게 이 사람의 직업과 그가 속한 세계 탓인가 했었거든. 그걸 명백하면서도 직접적이지 않게 펼쳐놓다니 대단한 글솜씨다. 장인의 붓질이 느껴진다. 외국인으로서 원서를 읽을 때 반은 반투명한 장벽을 치고 읽는 거나 다름없는 내가 이런 걸 집어낼 수 있었다는 것은 ― 게다가 암시로만 이루어진 작업이었다 ― 작가가 뛰어나단 뜻이다. 명백하다는 것은 버틀러의 말투가 다른 사람보다 아주 약간 더 구어체라는 정도인데, 실질적으로는 그게 전부다. 원래 말을 글로 쓰면 아이러니컬한 화법이 잘 전달이 안 되기 마련인데, 노골적이지 않으면서 재미있었다.


Posted by Iphinoe

  어떻게 해서 집에 있게 된 책인지도 모르고, 얼마나 오래 집에 있었는지도 모르는 책이 몇 권 있다. '꼬마신관 타론'도 그 중 하나인데, 언젠가부터 그 책을 꽤 좋아해서 내 책꽂이에 (내가 책을 좀 밝히는데다 까탈스럽게 다루다보니;; 집 책 중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소유권을 분명히 하는 편이다) 꽂아놓고 그 동안 가끔 때때로 다시 읽어줬었다. 원제가 'The Blue Hawk(당연히 원제를 더 좋아한다)'이다.


  영국에서 아이들을 위한 판타지에 주는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는데, 스토리가 과연 우화적... 아니 신화적이다. 기원전의 이집트-분위기는 고왕국 같다-를 지리적/지역적/문화적으로 닮았으되 섬기는 신이 좀 다른 일종의 alternative universe에서, 어렸을 때부터 신을 섬기는 신관으로 뽑혀 신전에서만 자라온 타론이라는 아무 힘 없는 소년 신관이 아차 하는 사이에 신관 집단과 왕 사이에서 벌어지는 주도권 다툼에 휘말려들고, 그 와중에 성장통과 형이상학적&윤리적 성찰을 함께 겪는다는 내용이다. (별 내용 아닌데 엄청 어렵게 썼다;;;;)


  무엇보다도 그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꿈결처럼 떠도는, 약간은 현실과 유리된 듯한 (단지 판타지라서가 아니다). 가끔은 부유하는 듯하고 가끔은 냉철한 시각을 택하는, 아아 지금 내 지쳐빠진 뇌로는 정의가 안 되는 분위기. 책 표지 색 탓도 있겠지만 그래서 이 소설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색감이다. 붉은빛과 약간의 보랏빛이 진한 듯 연한 듯 섞인 노을의 강한 빛깔, 딱 그 색이다. 원색보다는 파스텔톤에 더 가깝다. 내 주위의 공간을 꽉 채우듯 다가와 어느새 나마저도 물들여버리는 색.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그 선명하면서도 모호한 인상이 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는 것 같다. 참 어렵다.


  주제는 놀랍게도 상당히 무겁다. 책을 아우르는 주제는 옳고 그름과 취사선택의 문제 & 정치적 선택의 문제 & 과하면 좋지 않다는 중도의 논리지만, 책 뒤로 가면 신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종교의 문제의 한 면도 비교적 예리하게 도려내어 읽는 사람 앞에 펼쳐준다. 애들 책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는데, 솔직히 원문을 접해보기 전까지는 딱히 애들만 보라고 쓴 책이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원문의 단어가 너무 애들용이어서 혹시 revised edition(단어를 쉽게 다시 고쳐쓴 버전을 뭐라고 하더라??)인가 생각했을 정도다.


  작가는 Peter Dickinson. 몇 달 전에야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SF계에서 유명한 작가라고 한다. 꽤 다양한 작품 활동을 했던 사람인 모양이다. 'The Blue Hawk'만 봐도 확실히 그렇다. 이 책이 워낙 안 유명한 책이라 - 상 탔다고 다 유명한 건 아니니까 - 작가도 그러려니 하고 생각해오던;; 참이라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었다.


  '내 어린 시절의 책'이랄 정도로 좋아하고 매료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언제든 다시 잡으면 좋고 흐뭇하고, 평생 곁에 두고 보물처럼 쓰다듬어주고 예뻐해주고 싶은 책이다. 다시 출판될 리 없을 것이라 추천할 수가 없어 아쉽다. :)



  (2003. 12. 01)


Posted by Iphinoe

  (내용 추가하면서 등록 일자를 갱신했습니다.)



  Peter Dickinson의 1988년 작품.


  디킨슨이 자기 홈페이지에서 본인이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해왔고 책을 여러 권 냈음에도 받은 피드백의 70%는 이 작품에 대해서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 대표작입니다. 디킨슨은 다양한 분야에서 책을 냈습니다만, 제가 접했던 건 아동/청소년물 작가로서였고 Eva도 그 부류에 속하는 작품입니다.


  디킨슨은 현재 70대의 노령 작가이고, 책도 한두 권을 쓴 게 아니기 때문에, 그가 받은 피드백의 반 이상이 'Eva'에 대해서였다면 그건 그 작품이 엄청나게 감동적이거나, 아니면 엄청나게 논쟁적이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했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판단은 후자 쪽으로 기웁니다. 번역되지 않았고 번역된다는 소식도 들은 바 없어, 핵심 내용들을 그대로 다 소개하겠습니다.


  'Eva'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코마 상태에 빠진 아이의 의식을 되살리기 위해 침팬지의 몸 속에 아이의 정신을 이식한다는 것은, 윤리적 정신적 감정적 문제를 낳을뿐더러,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는 (책에 잠깐 언급된 것처럼) 법적 문제까지 야기합니다.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죠. 하지만 'Eva'의 초점은 무차별적으로 팽창해 나가는 인간들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인가, 문명의 종점은 어디일까, 그 후의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그런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인간의 사고를 할 수 있기에 미래를 고려할 수 있는 Eva는 침팬지의 사회에서 그들에게 독자적인 생존 방식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고, 인류의 현재를 통해 암울한 전망을 읽어내는 일부 사람들은 Eva에게 인류의 미래를 투영하고자 합니다. 거기에 환경주의자들도 있죠. 그리고 기업의 영리와 홍보와 투자가 모두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디킨슨은 굳이 프로파간다를 이야기 속에 은근히 퍼뜨려 놓을 만큼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의 화법은 Eva를 통해 나타나건, 건조한 묘사나 서술을 통해 드러나건, 충분히 직접적입니다. 그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암울한 전망을 제시하고 있고, Eva를 통해서는 ...이 부분을 잘 모르겠습니다. 디킨슨이 Eva를 통해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Eva가 침팬지들을 인간들의 보호구역에서 얼마 남지 않은 야생의 숲 속으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Eva가 모범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Eva는 매우 특수한 개체였고, 그의 독특한 정신은 후대에 전혀 계승될 수 없는 것입니다. Eva가 남긴 유산은 인간들로서는 따를 수 없는 것이고, 침팬지들에게는 매우 제한적으로만 남겨질 수 있을 뿐이니까요. 제 2, 제 3의 Eva를 만들려는 노력은 책 속에서 모두 실패로 돌아갑니다.


  논쟁적인 작품일 거라 생각하긴 하지만, 디킨슨이 인간들의 앞날에 대한 경고 외에 더 하고 싶은 말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Eva는 너무 독특하기에 동일시하기도 사랑하기도 힘든 인물이고, 그 점에 있어서는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이(인간과 침팬지를 모두 합쳐)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나 그 어떤 것도 분명하지 않은 느낌입니다. 무분별한 개발과 확장, 자연 파괴에 대한 뚜렷한 경고의 메세지 이외에는요.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매력적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 아무래도 이 작가가 그려내는 미래보다는 과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2006년 10월 1일)




  (2007. 05. 16 덧말)

  리퍼러 기록을 통해 간 링크에서 홍인기 님의 Eva 리뷰를 읽은 덕분에, Eva가 다룬 소재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최초의 어머니/여성 신화'라고 일컬어지는 이 테제가 아주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분명 어디선가 접한 적이 있다 싶긴 한데, 설사 그렇다 한들 그다지 잘 아는 내용은 아닙니다.


  덕분에 Eva의 이야기가 어디에 뿌리를 대고 있는지는 알았습니다만, 그럼에도 잘 모르겠어요. 뭔가 명쾌하지 않다는 느낌은 여전합니다. 디킨슨이 미래 세계를 그렸기 때문일까요? 워낙이 디킨슨은 아동/청소년 소설을 쓸 때는 우화에 가까운 이야기를 자주 시도하는 것 같습니다. <꼬마신관 타론 The Blue Hawk>도 그렇고 <킨 The Kin>도 그렇거든요. 하지만 두 이야기는 각각 고대 사회와 원시 사회가 배경이고, <에바 Eva>는 미래 사회가 배경이지요. 그 차이를 제가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여전히 물음표가 남아 있으니, 아직 깨우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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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phinoe

리뷰를 올린 바 있는, 피터 디킨슨Peter Dickinson의 소설 '에바 Eva'가 2008년 피닉스 상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는군요. 소식은 디킨슨의 홈페이지에서 접했습니다. 피닉스 상은 1985년 제정된 상으로, 아동문학협회(인 듯한)에서 시상하며, 영어로 쓰인 작품으로 20년 전 출간되었으나 해당 해에 주요 상을 받지 못했던 작품들 중에서 선정한다고 합니다. 아동문학을 좀 더 홍보하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군요. 선정은 협회원들과 다른 이들(누군지는..?)이 임명한 위원회에서 하게 되어 있고요. SF 쪽은 따로 주는 것 같긴 한데 확신은 못하겠습니다. 1989년부터는 Honor Book이라고 해서 한두 권씩 더 발표를 하기는 하는군요. 이건 수상작은 아닌 것 같습니다.


Phoenix Award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디킨슨의 다른 작품으로는 'The Seventh Raven'이 2001년 이 상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이걸 보고 드는 생각은, '그래, 역시 애들 용 책이었어...T_T'로군요. 아니 다른 뜻은 아니고, 번역본이 없어 원서로 읽었는데 어쩐지 술술 읽히더라 이 말씀입니다. T_T


Posted by Iphin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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