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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문답

재앙의 거리 2007. 10. 13. 17:11

  acrobat 님 블로그에서 받았습니다. 받고 보니 무슨 제목의 문답인지도 모르고 있군요. 이번에도 역시나 난해한 문답인데, 우야든둥 도전해 보겠습니다. 요새 생산성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일상을 살고 있어서 무어라도 쓸 거리가 주어진 게 반갑습니다. (다 쓰고 났으니 하는 말인데 그다지 내실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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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톤을 받는 5명 절대로 5명! (지정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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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정기적으로 들러주신다고 알고 있는 분들이 워낙 안 계셔서 5명은 고사하고 2명도 어렵겠는데요. 그래도 명희님께서 엑스파일, 혹은 밀레니엄, 혹은 둘 다, 혹은 1013 프로덕션의 전체 작품, 이 중 하나라도 해주실 수 있다면 무한한 감사의 말씀을... 아 이 설레발치는 버릇 좀 고쳐야 하는데... 미리 감사드립니다. (꾸벅)

  그리고 생각해 보니 보내신 분께 되돌리면 안 된다는 법은 없군요. acrobat 님, 역시 엘러리 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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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생각하는『엘러리 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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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달 전 '꼬리 아홉 고양이Cat of Many Tails'와 '재앙의 거리Calamity Town'(아마도;;)를 원서로 구했습니다. 퀸은 재담을 즐기기 때문에, 번역본을 읽으면서 원래는 어떤 표현으로 쓰여진 구절인가 궁금해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지요. 그리고 두 작품은 전반적으로도 그렇거니와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감정의 파고가 상당히 높은 편이라 원본의 묘사를 보고 싶기도 했어요.

  원문을 손에 넣기는 했는데 번역본이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어서, 아직 둘을 대조해 본다거나 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궁금했던 장면들을 찾아보고 나서 든 생각은 역시나 계속 해오던 1. 퀸이 좋다 2. 왜 그런지 꼬집어 말을 못하겠다, 쯤으로 요약할 수 있겠군요. 설문 목록을 보니 아래에서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것들과 같이 구한 'There was an Old Woman'은 '수수께끼의 038 사건'이라는 제목 아래 아동용으로 된 번역으로만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한글본은 그걸로 읽은 적이 있고, 이번에 도입부를 원문으로 조금 읽어본 결과 번역이 (그럴 거라 짐작은 했다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좀더 과하게 창작에 가까운 수준인 것 같더군요. 복잡하고 정신없이 들뜬 분위기로 작품을 몰아가는 퀸 특유의 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된 이야기라, 한두 발짝 떼면 모르는 단어에 걸려 넘어지는 언어로 읽기에 부담스럽긴 하지만, 정식으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러나 그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목표는, 더 최근에 구한 'The Glass Village'입니다. 매카시즘이 휩쓸던 당대 분위기를 반영한 작품이라고 들었는데, 퀸 부자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에 의욕이 좀 꺾이긴 했지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합니다. 어떤 식으로 다루었는지, 얼마나 다루었는지, 모두 알고 싶고 작품을 직접 읽어가면서 알고 싶어요. 지금 제 상태로는 언제가 될지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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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엘러리 퀸』에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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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 탐정 엘러리 퀸에게 감동받아본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몇십 살을 먹었어도 엘러리 퀸의 근본은 변함없이 경박한 청년이니까요. '일곱 번의 살인 사건Double, Double'의 마지막 장면 같은 경우 와닿는 데가 있기도 했습니다만, 그건 탐정 퀸의 마음에 대해서도 있지만 그걸 드러내는 작가 퀸의 방식에도 영향받은 게 커요. 찾아보면 비슷한 예가 더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쟁이 퀸에 대해서. 전 엘러리 퀸이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식을 좋아합니다. '미친 티 파티The Adventure of the Mad Tea-Party'나 중편 '신의 등불'은 딱 적당한 예고, 그만큼 좋은 예가 아닐지는 모르지만 '용 조각 문버팀쇠의 비밀The Dragon's Teeth'도 저는 그런 면에서 좋아해요. 별로 대단한 작품은 아닙니다. 지금 보면 낯간지러운 오리엔탈리즘도 들어 있고, 사건의 진상에도 의외의 요소는 전혀 없다고 해야 할 정도고, 엘러리는 자주 그러듯이 간단하게 처결할 수도 있었던 사건을 괜히 혼자 꼬았다 다시 풀죠. 하지만 그 분위기, 특히 마지막 결말 부분의 서술은 정말 좋아요. (설명을 좀 더 해보려다 실패했습니다.) 장편으로는 가장 최근에 읽었다고 할 수 있는 '꼬리 아홉 고양이'의 범인 체포 씬을 들 수 있겠네요.

  별로 '감동'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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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감적 『엘러리 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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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이 어렵습니다.

  전 탐정이 미스테리를 풀었다는 사실을 작가들이 어떤 식으로 드러내는지 관심을 갖는 편입니다. 이건 특히 고전기 추리소설을 읽을 때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순간을 (그릴 경우) 어떻게 그리는지에 대해서도요. 관심갖는 것치고 잘 기억하진 못합니다만.

  옆에 조력자 겸 관찰자가 있어 그의 시각에서 1인칭으로 이야기가 진술될 때는, 관찰자의 시각과 존재에 따라 그 순간이 다르게 나타나곤 하지요. 홈즈의 경우는 - 그가 오랜 세월 축적해온 범죄 수법과 전과자들에 대한 지식 덕분에 - 사건에 대해 듣는 순간 그 전모를 알아차리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비교적 친절하게 왓슨을 자신의 추리 과정에 참여시키는 편입니다. 특히나 홈즈가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거진 단편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정말 친절한 거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홈즈가 사건을 해결하는 순간에도 왓슨이 곁에 있어 그 광경을 진술해 주는 경우가 많고요. 포와로의 경우는 헤이스팅즈가 그다지 눈밝은 관찰자가 아니고 포와로도 결말에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서건 조력자를 끝까지 잘 활용하기 위해서건 마지막에야 모든 것을 알려주기 때문에 읽는 우리도 마지막에 가서야 포와로가 어느 시점에서부터 사건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헤이스팅즈가 떠난 뒤에는 작품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 신나게 쓰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이렇게 길어질 문단이 아니었어요;;)

  1인칭 조력자가 없는 경우는 그야말로 작품 따라 천차만별인데요, 퀸은 대부분의 경우 퀸의 마음 속을 그대로 그려주진 않아도 추리의 과정은 비교적 투명하게 서술하고, 어느 시점에서 수수께끼의 답에 대한 확신이 섰는지 알려주는 편이죠. 그리고 우리나라에 출간된 작품들만 놓고 봤을 때 열에 아홉은 진상을 깨닫는 그 순간을 잡아주거나, 아니면 그 정황이라도 그려줍니다. (노파심에서. 전 지금 그 유명한 '독자에의 도전'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퀸의 화려한 실패로 악명높은 '그리스 관의 비밀'은 그 대표적인 예고, 단편에서도 이 점은 비교적 잘 지켜져 온 것 같아요. 항상 극적으로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매번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됩니다.

  질문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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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엘러리 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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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관성 있게 풀어 설명할 수가 없으니, 일단 떠오르는 걸 나열해볼까요.

  전 바너비 로스보다 엘러리 퀸을 더 좋아합니다. 따라서 비극 시리즈보다 라이츠빌 시리즈와 국명 시리즈를 더 좋아하지요. 탐정으로서도 드루리 레인보단 엘러리 퀸입니다. 그리고 퀸을 좋아한다고 하기가 무색하게도 퍼즐풀이나 추리대결의 요소보다는 작품 이곳저곳에 깔린 유머와 때로 말장난에 가까울 정도인 문체를 더 좋아합니다.

  결국 관건은 '재미'인 것 같아요. 얘기가 거기서 끝나는 건 아니지만. 전 퀸이 작품 전반을 통해 부리는 재치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것 같다'를 반복하는 것만 봐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건 아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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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에 『엘러리 퀸』이 없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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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정 엘러리 퀸이 없었대도 세상은 돌아갔을 겁니다.^_^ 작가이자 편집자고 출판인으로서의 엘러리 퀸이 없었다면 세상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 두 사람의 명성을 실감하기보다는 듣기만 한 축이니까요. 미국에서는 출판인으로서의 엘러리 퀸의 존재가 잘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제 자신이 잘 알지는 못하고, 일본에서는 작가로서의 엘러리 퀸의 영향력도 상당하다고 합니다만 역시 전 모르는 영역이라서요.

  제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줄긴 했겠지요.



Posted by Iphinoe

  왜 추리소설을 읽는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왜 추리소설을 좋아하는지, 답이 잘 안 나오더군요. 전 뭘 좋아하면 왜 좋아하는지를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터라. 그런데 이 문제는 항상 답이 잘 안 나와요.^^;


  물론 근본은 '재미있으니까'인데, 여가 선용할 작정으로 추리소설을 집어들 때를 보면 아무래도 익숙하다는 게 제게 장점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장르문학은 아무래도 고유의 독해(?) 방식이 있지요. 그 방식을 일단 아니까, 설사 낯선 책을 대할 때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익숙함이 있습니다. 물론 이걸 '추리소설 읽는 이유'로 내미는 건 한참 초점을 벗어난 거죠. 애초에 왜 읽기 시작했나, 이 장르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나가 관건이니까요.


  그런데 묘한 것은, 추리소설의 기본적인 독해 타입과 저는 거리가 멀다는 겁니다. 전 트릭에 신경쓰지 않아요. 읽는 동안은 반전에도 거의 괘념하지 않지요. '추리소설'의 '추리'에 굳이 개의하지 않으며 읽곤 합니다. 작가와 대결하듯 '범인을 맞춰보자!' 하고 책을 읽으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저는 그런 방식과 거리가 멉니다. (그러면서 독자와 대결을 즐긴다는 퀸 씨 같은 작가/탐정 작품을 좋아하니, 저도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전 왜 추리소설을 읽는 걸까요.


Posted by Iphinoe

  이 글은 우리나라에 잘 알려졌다고도 할 수 있고 잘 안 알려졌다고도 할 수 있는 법정소설 작가 스콧 터로Scott Turow에 대한 글로, 추리소설과는 관계없는 작은^^ 동호회에 소개하는 의미로 올렸던 글입니다. 2007년 1월 27일 엔트리로 되어 있군요.

  이 글과 아랫글인 The Burden of Proof 리뷰는 어떤 의미에서는 연결되어 있다고도 해도 좋을 글입니다. The Burden of Proof를 읽은 건 2006년 여름이었는데, 읽자마자 감상을 무척이나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잘 써지지가 않아서, 어영부영하다 6개월 이상을 끌었습니다. 그 지경이 되면 보통 대충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들을 1, 2, 하고 나열해 가며 할 수 있는 한 끄집어낸 뒤 던져버리는데, 이건 한 편의 '글'로 쓰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던고로 쓰지 못하는 채로 질질 끌었습니다. 그러다 위에 말씀드린 동호회에 추천하고 싶은 것들을 소개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 게 계기가 되어서, 가볍게 쓰기 시작한 터로에 대한 글이 지금 이 장문의 글로 첫 결실(?)을 맺고, 내친 김에 The Burden of Proof에 대해서까지 쓰게 된 거지요.

  역시 활자의 압박이 클 것 같아 접습니다. 이 태그 쓰는 데 재미들렸는지도 모르겠네요.

  펼칩니다

  스콧 터로우Scott Turow는 87년에 데뷔하여 지금까지 두 권의 논픽션과 8편의 장편 소설을 출간한 작가입니다. 가장 최근작인 Limitations(2006)를 제외하면 시계처럼 정확하게 3년에 한 권씩 소설을 냈지요. 우리나라에는 논픽션 두 권을 합쳐 모두 다섯 권이 번역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작가의 작품이라면 우리나라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아마도 '열정 속으로, 하버드 로스쿨One L(2004)'일 것입니다. 이 책은 '법과 대학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1996년에도 출간되었지요. 다른 제목으로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비 리그와 조기유학의 붐을 타고 어느 정도 입소문을 얻은 것으로 압니다. 애초에 2004년 출간은 그런 시류에 부합하려는 의도가 컸을 겁니다. 국제변호사가 꿈이라는 아는 애 집에 갔더니, 참으로 빈약했던 그 녀석 책장에도 이 책이 꽂혀 있더군요. 저자가 하버드 로스쿨 출신이고, 자신의 경험을 에세이 식으로 적었기 때문에, 이 책은 '닥터스' 류와는 다르게 논픽션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네, 스콧 터로우는 변호사입니다. 시카고에서 검사보로도 일한 적이 있고, 지금도 로펌 체인에서 파트너로 일하고 있습니다. 추리소설 작가로 명성을 얻은 이후로는 주로 무료변론에 주력하고 있다고 합니다만, 일선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2003년에 나온 'Ultimate Punishment(우리나라에는 '극단의 형벌'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는 자신이 경험했던 사형수 변론, 그리고 일리노이 주 사형 위원회 소속으로 2년 동안 사형제의 실효성 여부를 검토하는 작업에 참여했던 경험을 토대로 사형 제도애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낸 책입니다.

  전 'One L'을 읽어보지 못해서 이 논픽션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지만, '극단의 형벌'은 사형 제도에 관한 고찰로 매우 좋은 책입니다. 우리나라의 사형 제도에 대한 논란은 당위성에 대한 공박으로만 흐르는 측면이 있는데요(사회적 비용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존치론 측에서만 주로 사용되는 논거지요), 이 책은 사형 제도의 사회적 비용이라던지, 현실적인 한계와 위험 등등을 미국 현실에 확고하게 발을 딛고 서술합니다. 너무나 미국에만 적용되는 이야기여서, 되려 한국의 경우에 비추어 볼 수 있는 측면이 확연해질 정도지요. 터로는 자신이 검사와 변호사로서 사형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가를 묘사하면서, 두 건의 무료 변론에서 사형수에 대한 변호를 맡고 변론을 치러낸 과정을 통계를 곁들여서 개인적 경험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도록 서술하고, 거기에 일리노이 주에서 주지사의 결단으로 공공의 비용을 들여 2년 동안 사형제의 장단점 조사를 목적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에서 어떤 작업을 어떻게 했는지 보고하는 방법을 통해 사형 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도 사형제 폐지론자와 존치론자 사이를 왔다갔다한 경험이 있다고 하고, 그걸 진솔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이 우리나라에 출간될 때 소개글에서는 작가가 사형 제도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고들 했고 온라인 서점 독자 리뷰를 봐도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이 책을 쓸 때 터로는 폐지론자로 자기 입장을 자리매김했던 것 같습니다. 일리노이 주 사형 위원회의 최종 권고안도 그런 내용이고요.



  논픽션 이야기를 먼저 한 것은 이 작가 개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조금 소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작가 자신이 법을 다루는 직업에 몸담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터로는 존 그리샴과 흔히 비교되곤 한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둘 다 미국에서는 베스트셀러 작가에 속합니다만, 우리나라에선 그리샴의 유명세가 워낙 엄청나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교조적이고 대중적인 그리샴보다 터로우가 그리는 인물들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터로우는 법정소설 작가로 불립니다. 그 맥락에서도 존 그리샴과 비슷하지요. 추리소설에는 여러 장르가 있습니다만, 법정소설은 변호사나 검사, 판사 등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중심 인물로 등장하는 소설들을 가리켜 부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법을 '다룬다'는 건 주로 해석의 문제를 말합니다. 형사는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겠지요.) 반드시 법정이 무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법의 여러 측면들을 소설의 뿌리로 삼는 그리샴과는 달리, 터로우는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주인공일 뿐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전혀 별개일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 터로우가 출간한 소설의 목록을 소개합니다. 번역본이 있는 경우는 번역본 제목을 달았습니다. 아직 절판 안 된 건 따로 설명을 붙였고요.

  1987 Presumed Innocent ('무죄추정' '의혹')
  1990 Burden of Proof
  1993 Pleading Guilty ('증발')
  1996 The Laws of Our Fathers
  1999 Personal Injuries
  2002 Reversible Errors ('사형판결', 2005. 아직 유통중입니다)
  2005 Ordinary Heroes
  2006 Limitations

  그의 모든 소설은 시카고 근교로 설정된 가상의 킨들 카운티Kindle County를 무대로, 다양한 법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위에 썼듯이 현재까지 8권이 출간되었고, 저는 국내에 번역된 3권과 90년에 나온 Burden of Proof를 읽었습니다.



  데뷔작인 '무죄추정'은 개성 강한 작품입니다. 호불호를 떠나 읽으면 잊히지 않는 작품이고, 스타일과 소재 모두가 센세이셔널해서 다 읽을 때까지 읽는 사람을 붙들고 놓지 않는 그런 소설입니다. 변호사 자격증을 딴 후 검사로서만 경력을 쌓아온 30대의 젊은 지방검사보가 자기가 수사하던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기소되게 된다는 초반부 내용은 설정만 들어도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나요? 후반부는 재판에 할애되어 있습니다만, 전후반부 모두 사건이 흘러가는 양상보다 그걸 주인공인 '나'가 어떻게 소화하는가가 소설의 핵심으로 다뤄집니다. 어떤 분^^께서 제게 하신 말씀대로, 문장 하나하나마다 에고가 넘쳐나는 소설이에요. 이 작품은 1인칭을 굉장히 영리하게 활용합니다. 1인칭 시점은 주인공이 독자에게 말을 거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독백이기도 하지요. '무죄추정'은 한 사람의 진술 안에 그 두 가지를 교묘하게 섞으면서 무려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를 독자들이 신뢰할 수 없게 만듭니다.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도 만들어졌습니다. 이것도 꽤 잘 만든 스릴러입니다. 해리슨 포드 주연으로 어느 정도 유명했기 때문에, 보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다음 작품인 'Burden of Proof'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좀 보입니다. '무죄추정'에서 후반부의 핵심 인물 중 하나로 주인공의 변호를 맡았던, 킨들 카운티의 잘나가는 변호사가 주인공입니다. '무죄추정'에서는 형사전문변호사로 등장해서 속을 알 수 없는 인물로 그려졌었지요. 여기서는 그의 가정사와 개인사가 큰 줄기를 이루고, 그의 변호사 생활 동안 줄곧 가장 중요한 - 여러 의미로 - 고객이었던 의뢰인이 기소의 위협을 받는 데 따른 변호사로서의 업무가 엮여듭니다. 이 의뢰인은 주인공의 매부이기도 해서, 두 가지 이야기를 하나로 유지해 주지요. 출장에서 돌아와 아내가 아무 예고없이 자살한 것을 발견한 주인공의 모습으로부터 소설이 시작하기 때문에, 초반부는 아내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 없어 방황하는 주인공의 모습과 아내가 자살한 연유를 추적하는 내용이 중요하게 그려집니다만, 갈수록 매부 회사 쪽의 비중이 늘어납니다.
  이 소설의 문체는 3인칭으로 시점을 바꾸었습니다. 여기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캐릭터가 아마도 터로가 가장 아끼고 자신과 동일시하는 인물이 아닌가 합니다. 읽다 보면 작가와 등장 인물의 거리가 매우 좁다는 게 느껴지지요. 그리고 이 인물은 킨들 카운티 시리즈를 통틀어 꾸준히 재등장하면서 자신의 자취를 작품 어딘가에는 꼭 남겨놓는 캐릭터거든요. '무죄추정'의 주인공과는 달리 독자들이 공감하기도 쉬운 인물이고요. 작가가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늘 꿈꾸는 일탈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걸 데뷔작에 이어 여기서도 보여주는데요, 이 주인공은 그 일탈조차도 꼭 자기처럼 지극히 온건하고 차분한 방식으로 겪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약점은 감상적인 결말인데요, 이 이야기는 있다 아래서 다시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매우 온화한 사람이라 - 아내의 죽음으로 나름의 중년의 방황을 겪습니다만 - '무죄추정'이 주었던 밀도있는 분위기는 조금 떨어집니다.

  그 다음 작품인 '증발'은 저를 결정적으로 터로의 독자로 여기게 만든 작품입니다. '무죄추정'도 정말 좋은 작품이지만 소재가 워낙 센세이셔널하고 주인공이 처한 위치가 너무 특수해서, 한 작품으로서야 더할 나위 없지만 작가의 경향을 짚어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감이 있어요. 더군다나, 두 작품 사이에 낀 'Burden of Proof'를 읽고 난 뒤로는, '증발'이 거둔 성과가 아니었다면 터로가 소포모어 징크스를 극복하고 안정감 있는 타율을 보여주는 작가의 길로 접어들기는 조금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증발'은 소송변호사지만 거대기업인 항공사의 일을 주로 받아 관리해온 로펌 소속의 민사변호사를 주인공으로 삼습니다. 여태까지 두 작품을 통해 그려온 킨들 카운티의 한 구석으로부터 조금 벗어난 다른 무대지요. 소속 변호사 하나가 자신들이 관리하고 있는 기금에서 거금을 횡령하고는 모습을 감추자, 로펌의 운영위원들은 파트너의 위치에 있지만 최근 몇 년간 별볼일 없이 처신해온 주인공을 불러들여 그를 추적하는 일을 맡깁니다. 이 기금에 워낙 많은 것이 얽혀 있는 터라 되도록이면 법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일을 조용히 처리하려는 것이지요. 주인공은 그 일을 해나가면서 자신이 이 일에 개인적인 감정을 투영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몇십 년간 차분히 쌓여와 이제 자신을 엄청난 무게로 내리누르는 인생의 공허를, 그 허무를 해결하는 문제를 이 일과 동일시하게 된 겁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 길을 걸으면서 인간적으로 신뢰했던 사람들의 이면을 보게 되고, 어떤 선택을 합니다.
  이 작품의 결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매우 기억에 남습니다. 충격적이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어떤 의미로는 기대하는 감정도 남지요. 터로는 일탈의 감정을 여기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그 때문에 각각 매우 다른 이 세 소설에 어떤 일관성이 부여되는 듯합니다. 그리고 '증발'은 그걸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정이입할 수 있을 차원에서 그리고 있습니다.

  'The Laws of Our Fathers'는 터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Burden of Proof'에 등장했던 인물들 중의 하나가, 여전히 법을 다루는 직종에는 있지만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위치에서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이것도 터로가 그리는 킨들 카운티의 특징 중 하나인데요, 법 주변에서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위치를 옮겨 가며 그 주변에서 맴도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현실에서의 시간과 소설 속에서의 시간이 같이 흐르면서, 그 동안 검사가 판사가 되고, 형사법정에서 일하던 사람이 민사법정으로 가기도 하고, 임기가 찬 판사는 퇴직하고 스캔들로 옷을 벗기도 하고 감옥에 가기도 합니다. 그 속에서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며 중추가 되는 인물은 'Burden of Proof'의 주인공 스턴입니다.
  이 작품은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다만 기대와 더불어 우려가 되기는 합니다. 터로는 여성 캐릭터를 그다지 잘 그려내는 편은 아니거든요. (솔직히 이건 모든 남성 작가를 대할 때 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들어가는 부분이라 잘 그려주면 다행이지만 못 그린다고 제게 있어 평가가 깎이는 법은 없습니다.) 주인공이나 그 주변 인물을 형상화할 때 특수한 상황 속에서 그리면서 그 안에서 보편적인 모습을 끄집어내는 데 능한 사람인데 여성 캐릭터를 다룰 때는 이게 무척 약합니다. 이래저래 여성 캐릭터가 많은 'Burden of Proof'도 그런데, 이 작품은 여자가 주인공입니다. 남성의 시선이 들어간 여자 주인공을 보는 것만큼 불편한 일도 별로 없거든요. 하지만 기대를 걸고는 있습니다. 출간된 지 10년이 지난 작품에 대해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긴 하지만, 잘 해주었길 빌어요.

  2002년에 나온 'Reversible Errors'는 '극단의 형벌'의 출간 시기를 보면 아시겠지만 - 그리고 이 책 내에도 언급이 나옵니다 - 터로가 일리노이 주 사형 위원회 일을 하고 있던 비슷한 시기에 쓴 작품입니다. 위원회가 구성될 무렵 이미 집필에 들어간 상태였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세트로 묶여다니는 비운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만, 사실 'Reversible Errors'는 사형 제도에 대한 소설은 아닙니다. 사형수가 플롯 전개에 핵심 인물이긴 하지만 그가 주인공이라 보기도 어렵고요. (그래서 번역판 제목 대신 원제를 적었습니다.) 'Reversible Errors'는 사형을 눈앞에 둔 사람 때문에 과거의 사건을 재고해보게 된 상황을 바탕으로 당시 이 일에 관련되었던 사람들, 현재 그 일에 관련된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를 병치해 그리면서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거나 화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추리의 요소가 섞여 있긴 하지만 장르 문학으로서의 요소가 매우 약하고, 터로도 인정한 바대로 주가 되는 건 사랑 이야기입니다.
  분위기가 좋은 소설이긴 한데 결말이 너무 치우쳐 끝나서 그게 많이 아쉬웠습니다. 한 커플은 잘 되고, 다른 한 커플은 갈라서는데, 그 이유가 마치 타인을 믿어주느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식으로 흘러서 아쉬웠어요. 신뢰와 용서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쌓아온 개인적인 관계의 시간과 그 무게가 뒤에서 작용한 것인데 말이지요. 이것 역시 다시 언급하게 되겠지만 터로의 감상주의가 오버한 부분이라, 읽는 사람 따라 감동받을 수도 있는 부분이었지만 제게는 지나친 나머지 저를 튕겨내는 그런 요소였습니다.



  터로는 일상의 무게를 벗어나는 일탈을 꿈꾸는 사람들을 잘 그립니다. 그 정체를 '무죄추정'에서 '희망'이라는 말로 표현하지요. 무언가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무언가 나아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 그리고 그런 실낱같이 가벼운 무게에 기대는 사람들의 황폐한 심사를 그리는 데 있어 탁월한 재주를 갖고 있습니다. '무죄추정'에서 최종판결이 내려지면 자기가 집어넣은 죄수들이 드글드글한 감옥으로 가야 할 지도 모르는 주인공이 밤마다 잠못이루고 집을 서성거리는 대목이라던지, 'Burden of Proof'에서 아내의 자살이라는 선택이 남편인 자신에 대한 비난이라고 느끼는 주인공이 스스로를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에 대한 묘사 - 그 역시 밤마다 집구석을 배회하면서 머릿속을 구체화할 수도 없는 생각들로 가득 채웁니다 - 는 정말 탁월합니다. '사형판결'에서도 주인공은 너무 많은 책임감을 짊어지고 그 무게에 짓눌린 인물이죠. 지금까지 읽어본 바로는 이게 가장 빛을 발하는 작품이 '증발'이었기에, 저는 개인적으로 '증발'을 터로의 작품들 중 맨 위에 놓습니다.
  이 재주는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합니다. 일단 감상주의로 흐를 함의가 너무 커요. 살짝만 너무 나가도 감정이 흘러넘쳐서 질펀해지고, 결과적으로 혼자 취해 마구 우는 술친구를 옆에서 말짱한 정신으로 보고 있는 기분이 되지요. 그래서 저는 터로가 1인칭 시점을 쓸 때를 더 좋아하는데, 3인칭으로 쓰면 과도한 감상주의가 작가가 절제를 못한 결과가 되는 반면, 1인칭으로 쓰면 감정이 마구 흘러넘쳐도 일견 '나'의 개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도 제가 좋아하는 '무죄추정'과 '증발'은 1인칭 시점이고, 좀 넘친다고 생각한 'Burden of Proof'와 'Reversible Errors'는 3인칭 시점입니다. 현재까지의 출간작을 반 읽은 시점에서 이렇게 딱딱 둘로 나뉜 결과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다른 작품이 빨리 읽고 싶어져요.

  터로를 '좋아하는 작가'라고는 못하겠습니다. 그러기엔 살짝 낯간지럽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 중 어떤 것들을 아주 많이 좋아하는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장점이 곧 단점이 되는 그 경계가 분명한 작가이기도 해서, 다른 작품을 계속 찾아보게 만드는 동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작품은 어떻게 썼나 궁금해 하게 만들거든요. 그리고 킨들 카운티라는 배경에 충실히 남아 있어 주어서, 법원을 중심으로 각자의 작은 원을 그리는 주변 인물들이 긴 시간에 걸쳐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이렇게 긴 글이 될지 몰랐는데 지금 좀 놀라고 있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소개글이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마지막으로 터로의 공식사이트를 소개합니다. URL이 (당연하게도) http://www.scottturow.com 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출간된 '극단의 형벌' 본문에 이 사이트의 여러 페이지가 각주로 들어가 있는데요, t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지 번역본에서는 t를 다 하나씩 빼버렸더랍니다-0- 읽다가 엄청 웃었습니다.

Posted by Iphinoe


작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해놓았으니 바로 들어가도 되겠군요.^^ 응집력 있게 몰아친 데뷔작 '무죄추정'에 비해, 'The Burden of Proof'는 터로의 장점과 단점 - 이라기보다는 그 한계 - 을 모두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무죄추정'을 읽으신 분이면 누구나 기억하고 계실, 변호사 알레한드로 "샌디" 스턴입니다. 스턴은 전편 '무죄추정'에서 주인공을 변호하는 형사전문변호사로 나왔었습니다. '무죄추정'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들은 모두 흥미롭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스턴은 끝까지 자기 자신을 거의 내비치지 않기 때문에 독자의 호기심을 가장 자극하는 인물입니다. 특히 소송의 종결부에서 주인공과 스턴이 나누는 대화는 이 책에서 가장 호기심 끄는 플롯 중 하나가 새털같이 가볍게 암시되듯 다루어지며 묵직한 빛을 발하는 대목이었지요.


'The Burden of Proof'는 스턴에서부터 시작해서 스턴으로 끝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편에서 스스로를 너무 드러내지 않아 신비스럽기까지 한 존재로 등장했던 스턴의 개인사와 가족사는 엄청난 깊이로 다루어집니다. 스턴의 대척점에 서 있는 캐릭터 또한 스턴의 가족의 일부이죠. 스턴의 하나뿐인 피붙이, 여동생의 남편이니까요. '무죄추정'에서 제시되었던 스턴의 개인사 중 일부는 여기서 모습을 바꾸어 나옵니다. 소문이 잘못 전해졌거나 전편의 주인공 '나'가 잘못 알고 있었거나겠지요.=) 'The Burden of Proof'는 전편의 이야기로부터 3년 후에서 시작합니다. (소설이 출판되는 시간 간격과 같이 가더군요.) 스턴은 당시 재판이 전국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바람에 그 이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몸이지만, 자기가 변호사 일을 해올 초기부터 맡았던 매부 회사의 일들은 여전히 자신이 직접 처리하고 있습니다. 50대 후반으로 접어들어, 세 자식들은 모두 독립시켰고, 아내와는 몇 년 전 불화도 좀 있었지만 지금은 예전 패턴으로 돌아가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요.


매부 회사의 일로 시카고에 출장을 다녀온 그는 집에 들어서다가 아내가 밀폐된 차고에서 차 시동을 걸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발견합니다. 경찰이 다녀가고, 유서가 발견되어 자살로 처리되지만 유서는 달랑 한 문장뿐입니다. 'Can you forgive me?' 스턴은 아내가 자살할 만한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왜 자살했는지도 전혀 짐작가는 바가 없습니다. 갑자기 닥친 이 시련은 스턴의 생활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터로는 인간의 황량한 심사를 그리는 데 능합니다. 여기서도 갑작스레 아내를 보낸 스턴은 정상적인 생활로 쉽사리 돌아가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그건 오랜 세월 함께해 온 동반자를 잃은 상실감과는 조금 다른 감정입니다. 아내의 죽음, 그것도 자살이라는 방식의 죽음과 화해할 수 없어 무언가 말이 되는 설명을 갈구하게 되는 거니까요. 그는 아내의 선택이 자기 자신에 대한 비난이라고 느끼고 죄의식을 가지며, 죄책감을 갖게 하는 상황에 대해 다시 막연한 분노를 느낍니다. 스턴이 자기 집을 유령처럼 배회하며 조그만 것이라도 단서가 될 만한 걸 찾아 이 방 저 방 헤매는 대목은 길게 나오지도 않는데 정말 탁월합니다. 아내가 그에게는 그 어떠한 암시도 내비치지 않은 채 그런 결정을 내리고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스턴이 답을 찾아 헤매는 과정은 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두 가지 플롯 중 하나입니다.


다른 하나의 뼈대는 매부 회사 쪽에서 옵니다. 이건 소설이 시작되기 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일이고, 소설의 문을 여는 스턴의 시카고 출장도 이 일의 일부였습니다. 스턴의 매부인 딕슨은 맨손으로 시작해 굴지의 기업을 일구어낸 자수성가형 기업가로, 그런 사람이라면 흔히 상상할 수 있을 만한 자신만만한 태도에 주위 사람들을 손에 쥐고 자기 뜻대로 휘두르는 타입의 인물입니다. 그와 스턴은 둘 다 사회에 막 첫발을 내디딜 무렵 군대에서 만난 사이로, 스턴은 매부를 결코 좋아한 적이 없지만 변호사로 자립할 초기부터 그로부터 큰 도움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기에 직업적인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그와는 상관없이 스턴과 그의 여동생은 매우 가까우며 서로를 깊이 아끼는 관계로, 아내가 죽기 전부터도 매일 꼬박꼬박 전화를 주고받고 안부를 교환하는 사이로 그려집니다. 딕슨은 자신의 가족이 없기에, 스턴의 가족들과 가깝게 지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스턴의 아이들까지 고용하는 형식을 취해 가면서 자신의 곁에 두기도 하지만, 그 관계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나오지요. 이 소설의 도입부에서, 딕슨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대배심(정식 재판으로의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심의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따로 판사와 배심원을 두고 비공개로 치러집니다. 심문은 검사가 진행하고, 소환된 사람들의 변호사는 입회가 허락되지 않습니다)의 소환장이 딕슨의 회사 사람들과 기록을 상대로 날아오고 있는데, 그들이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거든요. 스턴은 딕슨과 딕슨의 회사를 대리해 킨들 카운티의 검사를 상대하고 있습니다만, 위협은 시간이 갈수록 커집니다.


두 중점 플롯 사이사이에는, 변화에 맞닥뜨리고 적응해 가는 스턴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유부남'에서 '홀아비'로 위치가 바뀌면서 동년배의 여성들의 성적인 암시가 증가하는 것에 당혹스러워한다던가, 스스로도 매력적인 여성을 보면 눈길이 가는 것에 당황스러워한다던가 하는 모습들이지요. 책에서 하는 말대로 스턴은 '그런 쪽으로는 오랜동안 스스로를 차단하고 살아온'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는 물론이고 스스로의 변화도 자신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자기 인생을 돌아보게도 되고요. 새로운 인간 관계를 맺기도 하고, 오래 알아오던 사람들에게서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실은 이게 책의 중심 내용입니다. 위의 두 플롯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추진력을 제공하지만, 핵심은 결국 그게 스턴이라는 한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쳐 어떤 변화를 이끌어내는가 하는 것이거든요. 30년을 같이 살았지만 서로의 사이에 존중이라는 이름의 거리를 두고 있었던 스턴과 아내 클라라라던가, 대배심이 노리는 바가 구체화되어갈수록 부침을 거듭하는 스턴과 딕슨의 관계라던가, 스턴이 마주치는 여러 여인들과 맺는 관계라던가, 여기서는 언급한 적이 없지만 스턴의 세 아이들과 스턴이 가져왔고 가져가게 될 관계까지도, 모두 스턴에게 부딪쳐 와 그를 뒤흔들고 바꿔놓고 이전과는 같고도 다른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 절정은 맨 마지막에 스턴이 모든 것을 정리하면서 읊는 기도문인데요, 그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 다시 하겠습니다.


내용 소개를 엄청 많이 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 요약을 한 거지만, 실제로 중요한 건 에피소드들이거든요. 제가 쏟아놓은 내용들은 소설 초반부에 거진 다 나오는 것들이고, 특히 소설의 핵심 미스터리 중 하나에 대한 이야기는 일부러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미스터리가 있냐고요? 두 플롯은 각자 수수께끼를 적어도 하나씩은 품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발전되어 가는 걸 보는 건 꽤 흥미진진합니다. 특히 딕슨의 회사와 관련된 수수께끼가 그렇지요.


터로는 이 소설을 3인칭으로 썼지만, 주인공 스턴을 누구보다 자신에 가까운 인물로 보고 애정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딱히 구체적으로 꼬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작가와 등장 인물간의 관계가 매우 가깝다는 게 읽다 보면 자연스레 느껴집니다. 그리고 사실 독자들이 감정이입하기에도 무리가 없는 매우 현실적이고 차분한 인물이에요. '무죄추정'에서나 여기서나 매우 침착하고 온건하고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아내의 자살로 일련의 방황을 하지만 그것조차도 지극히 스턴다운 방식으로 조용히 겪지요. 그 때문에, 얼핏 보고 스턴이 이 소설을 통해 한 바퀴 크게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말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책 초반부의 스턴은 후반부의 스턴과 아주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 변화는 딕슨을 통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요.


딕슨은 여러 면에서 스턴과 대척점에 서 있는 캐릭터입니다. 이민자 출신으로 변호사답게^^ 타협적이고 주위와 조화를 이루어 사는 데 큰 비중을 두는 스턴과 달리 딕슨은 자기 식대로 거침없이 세상을 헤쳐 나가며 그 앞에 놓인 것은 무조건 장애물로 보고 돌파구를 찾아내는 사람입니다. 자기 방식대로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탐닉하고, 인생의 즐거움은 넘칠 만큼 누리고자 하고, 뭘 하든 호쾌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이지요. 그런 딕슨에 대해서도 터로는 애정어린 시선을 유지합니다. 그건 터로가 스턴을 자기 자신을 투영해서 본 만큼 딕슨에 대해서는 자신(과 대개의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바를 감히 할 수 있는, 일종의 대리만족을 주는 캐릭터로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이건 소설에 스턴의 시선을 통해 언급이 나오기 때문에 제가 추측한 게 절대로 아닙니다.)


이 애정어린 시선은,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여러 캐릭터들이 만나 충돌하고 엉켜 흘러가는 이 소설을 마음 편히 읽을 수 있게 해주는 토대입니다. 만악의 근원이 되는 딕슨조차도 작가가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인간의 약점이나 과오에도 냉철한 시선을 들이댈 마음은 없어 보입니다. 그 시선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 소설 읽기는 꽤 괜찮은 경험이 될 겁니다. 적어도 마지막까지는요. 이건 제 이야기입니다. 그런 따뜻한 시선의 존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겁게 보았습니다만, 마지막에 가서 삐끗하는 바람에 감동(말하자면)의 범위가 좁아져 버렸거든요.


터로는 위에 말했듯이 사람들의 황폐한 심사를 그리는 데 발군의 재주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게 겉으로 드러나게 된 이유는 캐릭터마다 많이 다르지만, 여태까지 접한 터로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어느 순간 자신의 인생에 커다란 공허가 생겨 있는 것을 느끼고 있거나 느끼게 된 사람들입니다. 스턴의 경우는 그 공동이 자기 곁에 있어주었던 아내가 스스로의 선택으로 삶을 버리면서 생겨납니다. 이 공허는 처음에는 스턴의 내면을 위협하는 정도이지만, 그 정체가 구체화될수록 스턴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한순간에 휩쓸어가버릴 수 있는 거대한 파도가 됩니다. 그 모든 혼란을 정리하는 기능을 하는 게 마지막에 나오는 스턴의 기도인데, 이 기도가 결정적으로 저를 닭살돋게 만들었습니다.=) 터로의 주인공들이 겪는 황량한 심사는 대개 원인은 분명할지언정 그 구체적인 모습은 잡아내기 쉽지 않은 그런 감정들입니다. 그래서 그게 더 큰 울림을 지닐 수 있는 것이지마는, 이 경우 조금만 과도하게 그려주면 캐릭터들이 겪어나가는 감정이 독자를 튕겨내 이질감 느끼게 하기가 쉽습니다. 이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The Burden of Proof'에서 터로는 이 경계를 몇 번이고 아슬아슬하게 넘습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확 넘어버리는 대목이 그 기도인 것이죠. 사실 이 부분을 읽다가 전 큰 소리로 웃었는데,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였습니다.-_-; 그 기도만 없었어도 이렇게 뒤섞인 감상을 쓸 이유가 아주 많이 줄어들었을 텐데 말이지요. 다행히(?)도, 이 다음 작품인 '증발'은 문제의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이면서도 (제 판단에) 경계를 넘어가지 않아, 지금까지 읽은 것 중 가장 좋아하는 터로의 작품으로 꼽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 책을 읽으실 분이 있다면 이미 터로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신 분이겠지요. (아니면 몇 분들^^처럼 관심의 범위가 넓은 전문가시라거나.^^) 따라서 딱히 추천의 말씀을 드릴 만한 것은 없습니다. 읽어보실 분은 나중에 감상을 써주시면 정말정말 고맙겠습니다.^_^ 참, 이 책을 읽으시면 전편 주인공의 뒷이야기를 조금 얻어들을 수 있습니다.

(2007년 2월 9일)




윗글의 기도에 대한 제 언급은 스포일러를 최대한 자제하느라 할 수 있는 한 돌려서 쓴 거였습니다. 저한테는 무척 미진했지요. 그래서 결국은 이 뒤에 스포일러를 잔뜩 얹은 버전을 더 써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완성했습니다. 내용과 반전의 폭로에 개의치 않으실 분들은 아래를 눌러 마저 읽으시면 됩니다. 몇 분이나 계실까마는요. 네, 거의 윗글만큼이나 깁니다..


스포일러라 접습니다

위에서 저는 터로가 감상적이며 그게 문제의 기도 같은 장면에서 결정적으로 약점으로 부각된다고 썼습니다. 이 글은 그 대목에 붙는 부연입니다. 위의 말은 사실입니다만, 그 말고도 터로가 오버한다는 느낌을 주는 부분들은 종종 나온다는 걸 우선 언급해야겠습니다. 그럼에도 기도가 문제가 되는 건 그 모두가 합쳐진 결과라는 데 있기도 하고, 미스터리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결말을 흐리기 위해 둔 무리수에 얹혀진 장식이라, 잘못된 방향으로 너무 힘을 주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과도하게 감상적이라는 증거 중 하나는 작가가 딕슨에게 주는 면죄부입니다. 이 면죄부는 플롯을 꼬아 반전을 만들기 위해 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난봉꾼이며 악덕 기업가고 타인을 자기 멋대로 조종하는 걸 좋아하고 법을 농락하는 걸 재미로 아는, 딕슨이라는 개차반같은 인간-_-;;에게도 양심이 있었고 선한 면이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거든요.

터로의 아내 클라라의 자살과 딕슨 회사에 날아오는 대배심 소환장이라는 두 소재를 중심으로 돌던 플롯은 딕슨 회사 쪽 플롯의 가장 큰 수수께끼, 과연 제보자가 누구인가? 이 문제가 터뜨려지면서 하나로 묶입니다. 이게 소설 군데군데 단서를 흩뜨리면서 꽤 잘 꼬여 있어요. 반전을 모두 폭로하고라도 밝히고 싶은 대목입니다.^^

소설 전반부는 클라라가 자살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클라라는 병원에서 매독과 관련된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건 혼외정사가 있었다는 의미지요. 클라라의 생활 패턴으로 보아 스턴은 상대가 자기도 아는 사람일 거라 생각하고 그게 누군지 꾸준히 찾습니다. 우선은 클라라를 치료한 의사를 찾는 데서 시작하는데, 스턴은 의사인 자기 아들이 어머니와 가깝다는 데 생각이 미쳐 클라라가 그 문제를 아들과 상의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주치의는 스턴 부부 옆집에 사는 다른 의사였고, 그와 이야기해보고 스턴은 클라라가 몇 년 전서부터 자기 모르게 매독 치료를 받아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매독은 여기 나오는 바에 따르면 완치가 불가능하며 단지 증상을 억제하는 것만 가능한 질병이라는군요. 그리고 남자들의 경우는 겉으로 나타나는 증상 없이 보균만 하는 경우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한편 딕슨의 회사 쪽은, 검사가 적재적소에 소환장을 보내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내부 제보자가 있을 것이라는 쪽으로 스턴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추측이 모아집니다. 스턴은 소환된 서류들을 검토해보면서 딕슨이 주식 시장에서 회사에서 알게 된 정보를 불법적으로 이용해 개인적인 돈놀이를 했던 사실을 알게 되고, 검사의 추적이 그쪽으로 모아지고 있다는 심증을 굳힙니다. 딕슨의 회사는 오래 전부터 정부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왔고, 딕슨의 공격적인 태도가 여러 사람의 앙심을 샀기에, 기회는 이때다 하는 식으로 달려들고 있는 양상입니다. 문제는 그 구좌를 관리하고 있던 사람이 스턴의 막내사위였다는 것이지요. 존(그 친구 이름입니다) 역시 결국 대배심 소환장을 받습니다. 스턴은 딕슨과 딕슨의 회사 모두를 대리하고 있고, 존의 증언은 양쪽 모두에 해가 될 수 있기에, 스턴은 막내사위의 변호사가 되어주지 못합니다. 스턴은 이 일로 마음고생을 좀 합니다. 막내를 많이 아끼거든요.

그런데 막판에 밝혀진 제보자의 정체는 모두를(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제보자의 정체를 오래도록 모르고 있었던 - 제보자는 다른 기관에 제보를 했고 일선 검사는 기소만 맡았으니까요 - 담당 검사가 그걸 알고 격분한 모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읽는 사람들 이야기지 등장 인물 모두가 알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 깜짝 놀라게 합니다. 스턴의 의사 아들, 피터과 존이 합작해서 벌인 일이었거든요.

진상은 이렇습니다. (으하하, 무슨 탐정같은 말투가=_=) 피터는 오래 전부터 딕슨이 스턴 가족을 좌지우지하려고 애쓰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고, 어머니가 딕슨과 딱 한 번 외도한 결과로 매독에 걸려 고통받은 사실을 알고부터는 더더군다나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존은 썩 잘하는 일도 재주도 없는 사람으로 빨리 돈을 벌고픈 마음에 딕슨의 구좌에서 딕슨의 돈으로 돈놀이를 하다 딕슨의 돈을 까먹고 빚을 졌던 겁니다. 딕슨은 그걸로 존의 약점을 잡아 가지고 놀았고, 동생 부부와 친했던 피터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걸 딕슨을 벌할 기회로 포착했습니다. 존이 한 일을 딕슨이 한 일로 둔갑시켜 FBI에 제보한 거죠. 피터는 당연히 그 일을 어머니 클라라에게 말했고, 클라라는 매독이 통제가 안 되고 재발한 사실에다 옳지 못한 음모(?)와 가족간 불화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감정이 겹쳐 자살하게 된 겁니다. 딕슨은 당연히 일의 전모를 알고 있었지만, 클라라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당하고 있었던 거지요. 딕슨은 결국 스턴에게 검사와 유죄 인정 거래를 하라고 주문합니다. 재판을 거치지 않고 유죄를 인정하는 대신 형량 합의를 하자는 건데, 스턴이나 딕슨이나 그 경우 실형 이하로 합의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스턴은 양심상 그걸 반대하지만, 딕슨은 스턴이 자기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자기 손으로 할 만큼 냉철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고, 자기 뜻을 밀어붙입니다. 스턴도 자기가 결국은 합의를 받아들이게 될 거라는 걸 압니다.

그러나 스턴이 어떤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딕슨은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정부가 노린 건 딕슨 개인이었는데, 당사자가 죽었으니 수사고 기소고 아무 의미가 없어진 거죠. 그 일은 정부의 거대한 서류더미 속에서 잠잘 운명이 된 것입니다. 스턴의 일도 거기서 끝납니다.

한마디로 터로가 너무 물렀던 거죠. 딕슨을 감옥에 넣고 싶지도 않았고, 스턴에게 자기 선을 넘는 타협을 행하는 결말을 주고 싶지도 않았던 겁니다. 물론 이건 터로가 소설 내내 유지해온 따뜻한 시선에 걸맞는 결말이긴 합니다만, 너무 안이합니다. 숨을 열심히 불어넣어 풍선을 큼지막하게 부풀려 놓고는, 요란하게 터뜨리는 게 아니라 풍선 입구를 쥐고 있던 손을 놓아 바람을 피시식 빼버린 거예요. 거기다 딕슨의 영혼을 위한 스턴의 아름다운=_=(적어도 터로가 엄청 힘주어 쓴 건 알겠더군요) 기도까지 덧붙이니, 반전을 위해 차근차근 쌓아올렸던 그 많은 복선들의 정교함과, 길게 묘사될 기회를 얻진 못하지만 유죄 인정 거래를 놓고 하는 대립의 무거움 모두가 낭비된 느낌이 들어 버립니다. 특히, 스턴이 딕슨의 주문을 이행하면 도덕적인 굴복이 되지만, 그렇다고 안 하면 자기 아이들에게 해가 될 것을 안할 수도 없어 갈등하다 하는 쪽으로 정리가 되는 부분은 그 무게가 가볍지 않습니다. 워낙이 이 소설이 스턴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 며칠 전에 스턴은 변호사로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 가는 것도 불사하는 어떤 결단을 했었거든요. (그 때 스턴이 감옥 구경을 면한 건 오로지 담당 검사가 마침 제보자의 이름을 상사로부터 듣고 크게 동요해 스턴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읽는 분들이 놀라실^^까봐 덧붙입니다.)

이야기를 그 정도로 밀어붙여 놓고, 그 누구도 다치지 않게 딕슨의 죽음으로 끝을 내고 싶었다면 적어도 작가가 직접 딕슨의 죽음을 추모하는 건 자제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 공간은 독자들에게 주었어야 맞다고 봅니다. 그게 아쉬웠던 겁니다.

특히 반전을 그럴싸하게 만들어 주는 단서들이 군데군데 그렇게 유기적으로 뿌려져 있는 소설에서는요. 관계자가 대부분 스턴의 가족들이다 보니, 여기서는 사실과 사실 사이를 연결해주는 게 가족들 사이의 친밀도입니다. 피터가 존이 딕슨에게 빚을 지고 그로부터 정신적인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건 피터가 존 내외와 가깝기 때문이고, 클라라의 외도의 전말을 알 수 있었던 건 어머니와 가깝기 때문이죠. FBI에 거짓을 제보한다는 생각을 해내는 사람이 피터인 것은 존에겐 그럴 만한 머리가 없기 때문인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존이 애초에 딕슨의 그늘에 매여 있었던 것이고 딕슨의 돈으로 주식투자를 하다 원금을 까먹고 차액까지 생긴 겁니다. 전제가 되고 반전에 다리를 놓아주는 그런 정보들은, 스턴이 아내의 죽음으로 방황하느라 자기 주변을 돌아보고 고찰하는 와중에 꾸준히 독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주인공의 주변사이니 당연하게 묘사가 되는 거죠.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나면 범죄가 되는 그런 일을 꾸밀 수 있는 피터의 냉정하면서도 격정적인 성품도 스턴이 피터와 자신과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다 그려집니다. 심지어 클라라가 자살한 날 제일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사람이 피터입니다. (어머니가 왜 자살했는지 짐작이 가지 않겠어요.)

그렇게 잘 써놓고, 그걸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는 딕슨이 죽어서 모든 게 해결되었다는 식으로 쓰면 허무한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딕슨이 죽어서 모든 게 해결되었다는 결말 자체는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아까 말했듯이 모든 이야기가 워낙 인간에 대해 연민을 품고 그려지기 때문에, 작위적이긴 해도 사실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이 그것뿐인 마당에 그 길을 간다고 해서 비난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철저하게 제 입장에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너무 나가는 바람에(= 기도를 넣는 바람에) 산통을 깼다는 거죠.

그래서 소리내어 웃는 도리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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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phin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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