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단어가 무차별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원래 혼자 보려고 쓴 글이어서 그럽니다.)





1.  EQ의 하드보일드. 등장인물들 말투가 그간의 퀸답지 않게 거칠어서 조금 놀랐다만, ghostwritten 중에는 비슷한 것들이 있으니 그런가보다 하였다. EQ의 경찰소설이라니 생각보다 많이 재미있겠다 생각하고 시작했다.




2.  다 읽고 난 감상은, in short, 좋은 작품이로군,임. 이런 게 엘러리가 등장하지 않아서 묻혀야 한다니 안타깝다.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캐릭터들도 입체적이고, 내용도 재미있다. 현실적이라고는 못하겠으나 애초에 현실적인 플롯이 퀸의 장점은 아니다. (나는 상관 안 하는 부분.^^) 영어도 쉽고, 재미 만점이다. 무엇보다 즐거웠다.

...고 해도 되겠지.


근데, 경찰소설이라고 소개를 들었는데, 경찰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경찰 취재를 많이 했다고 하더라만, 아마도 원하는 식의 내용을 최대한 현실적으로 쓰고 싶었던 정도인 것 같아. 전혀 경찰소설 같지는 않다. 도입부만 그럴 뿐, 늦어도 3장 정도서부터는 통상적인 의미의 경찰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식으로 장르의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좋은 평을 받기가 힘들지만, 역시나 나는 신경 안 쓰는 부분.^-^ 그래도 워낙 하이브리드라서, 그에 개의치 않는 나야 좋아하지만 sub-genre별로도 호불호가 비교적 명확한 경향을 띠는 (특히 우리나라) 추리소설 팬들 사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다. 내 경우에는 하이브리드라서 좀 놀랐고 그 다음에는 아주 마음에 들었거든. 장르를 뒤섞는 재주야말로 제대로 하면 아주 재미있는 거니까.




3.  「Cop Out」의 특징 중 하나는, 읽기가 쉽다는 점. 퀸의 작품이 정말 맞나 싶은 요소들 중 하나다. 다른 것들 읽을 때처럼 (이를테면 국명 시리즈) 어렵지가 않아. 그리고 독자가 있으리라 예상할 만한 반전은 굳이 시간을 들여 묘사하지 않고 그 다음 씬으로 바로 건너뛴다. 따라서 실제로 속도가 빠르지는 않다지만, 경제적인 셈이다. 이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은 EQ가 독자의 마인드를 겸비하고 작가의 마인드를 끈 채로 자기 작품을 바라볼 능력이 있었거나, 아니면 편집자가 좋았다는 뜻이리라.


이 작품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의 EQ 팬페이지에서 찾았다. 맨프레드 리가 이 작품이 ghostwritten이 아니라고 강변했다는 얘기랑 이 작품에서 프레드릭 더네이의 터치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혹자의 평이랑 조합해 보면, 결국 이 작품은 Lee의 (더 많은) 노력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내가 받은 인상이 정확하다면 이건 글쟁이로 독자적으로 서고 싶었던 리의 노력의 결과물이었던 듯(다만 이건 팔할은 추측임).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 작품은 통상의 EQ라기에는 매우 이질적이거든. 정말 다르다.


하지만 다른 대로 정말 좋다. 마지막에 갑자기 환희의 정경을 묘사하는 거라든가, 그 부분에서 갑자기 문장이 현재형으로 바뀌는 것도 깨알같은 터치다. EQ의 유머감각은 감추어져 있지만, 이야기 진술을 건너뛰는 방식이 워낙 뛰어나서 그 정도는 넘어갈 수 있다^^.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이라는 특성이 있기는 하지만, EQ가 이렇게 저변이 풍부한 작가인 줄 미처 알지 못했다.


Manfy의 역량을 좀 더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이게 almost exclusively Lee-written이라면, EQ의 그 quirky, cocky humour는 (슬프게도) 두 사람 다의 개성이 아니라 Fred의 특성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4.  EQ의 이런 다양한 면모를 보다 보면 문득 이걸 나밖에는 모르고 있나 싶어 아쉬운 마음이 든다 - 설마 아니겠지. Christie는 워낙 다작이기도 해서 그 다양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EQ의 경우에는 - 적어도 우리말을 쓰는 추리소설 팬덤 내에서는 - 없단 말이야. 나로서는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하도 이야기가 드물어서 예전에는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있지도 않은 것을 내가 보고 있나 싶었는데, 「Cop Out」까지 보고 나니 모종의 확신이 생겼다.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거다. 늘 거기 있었다. 미국에서 본격물의 전통이 코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라져 버려서 EQ 이야기를 많이 안 하는 것이 아쉽다.




5는 뱀발: 해서 내친 김에 힘을 내어 「The Finishing Stroke」까지 도전하려고 펼쳤다가는 완전히 좌절했다.


내가 이 소설에 대해 특별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면 그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이 소설이 두 형제의 협업으로 3기의 마지막이라는 것. 이후 리는 긴 슬럼프에 들어간다. 둘째, 「Inspector Queen's Own Case」 바로 다음 작품이라는 것.


그러나 지금 목차를 통해 살펴보고 '현재'의 EQ 파트 첫 두어 장을 읽어보니, 이 소설은 EQ 두 사람의 매우 개인적인 memoir, 아니면 뒤를 돌아보는 의미가 담겨 있는 작품 같다. 이 책의 이야기는 세 시기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 1905년, 1929년, 1957년이다. 이중 1957년이 '현재'이고, 1905년은 두 형제가 태어난 해, 1929년은 이들의 데뷔작이 출간된 해이다. 맙소사. 게다가 엘러리는 (또) 자기가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엘러리가 예전에 알던 사람은 이미 죽은 지가 20년이 되었다. 맙소사. 이런 개인적인 작품은 설사 작품이 그렇지 않다 해도 나를 대단히 센티멘탈하게 만든단 말이다. 게다가 이 전작에서는 퀸 경감에게 짝을 찾아주었다! 이 사람들 무엇을 준비했단 말인가!!


여튼 그래서, 용기있게 읽어버리려고 꺼내왔는데, 순식간에 기가 꺾여버렸다. 이런 'Adieu'를 온몸으로 외치는 작품에는 - 심지어 제목에까지 'finish'가 들어간다 - 손내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Hoch는 「Face to Face」가 퀸이 직접 쓴 작품이라고 확신하고 있군. 그리고 그가 말한 대로 Lee가 좀더 serious fiction을 쓰고 싶어했다면, 「Cop Out」이 좀더 Lee style이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상당히 뛰어난 작품이다.


Posted by Iphinoe

몇 년 전에 모 님^^께서 모모한 클럽^^에 올려주신 저작 목록. ghostwritten인 경우 별도로 표시가 되어 있다.
출처는 적혀 있지 않았어서 모르고, 별 표시가 된 것들이 몇몇 있는데 왜 그런지도 알지 못한다.;;;;
기록 목적에서 올려둔다. 이제 보니 특히 장편 중에서는 생각보다 남은 것이 많지 않다.



Ellery Queen, pseudonym for
Frederic Dannay and Manfred B. Lee
Characters: Ellery Queen, Drury Lane


Queen, Ellery,


EQ's First Period:
--The Roman Hat Mystery, Stokes, 1929.
--The French Powder Mystery, 1930.
--The Dutch Shoe Mystery, 1931.
--The Greek Coffin Mystery, 1932. **
--The Egyptian Cross Mystery, 1932.
--The American Gun Mystery, 1933.
--The Siamese Twin Mystery, 1933. *
--The Chinese Orange Mystery, 1934.
--The Spanish Cape Mystery, 1935.


EQ's Second Period:
--Halfway House, 1936.
--The Door Between, 1937. *
--The Devil to Pay, 1937.
--The Four of Hearts, HarperPerennial, New York, 1938.
--The Dragon's Teeth, Signet, New York, 1939. *


EQ's Third Period:
--Calamity Town, Signet, New York, 1942. **
--There Was an Old Woman, Little, Brown, Boston, 1943.
--The Murderer Is a Fox, Little, Brown, New York, 1945.
--Ten Days' Wonder, HarperPerennial, New York, 1948.
--Cat of Many Tails, Little, Brown, New York, 1949. **
--Double, Double, Little, Brown, 1950.
--The Origin of Evil, Little, Brown, New York, 1951.
--The King Is Dead, Little, Brown, New York, 1952.
--The Scarlet Letters, Little, Brown, New York, 1953.
--The Glass Village, Little, Brown, New York, 1954.
--Inspector Queen's Own Case, Little, Brown, New York, 1956.
--The Finishing Stroke, Little, Brown, New York, 1958.


EQ's Fourth Period:
--Dead Man's Tale, Pocket Books, New York, 1961. (ghostwritten by Stephen Marlowe)
--Death Spins the Platter, Pocket Books, New York, 1962. (ghostwritten by Richard Deming)
--Murder with a Past, Pocket Books, New York, 1963. (ghostwritten by Talmage Powell)
--Wife or Death, Pocket Books, New York, 1963. (ghostwritten by Richard Deming)
--Kill as Directed, Pocket Books, New York, 1963. (ghostwritten by Henry Kane)
--The Player on the Other Side, Random House, New York, 1963. (ghostwritten by Theodore Sturgeon)
--The Player on the Other Side, John Curley & Assoc, South Yarmouth, Massachusetss, 1963. (ghostwritten by Theodore Sturgeon)
--The Golden Goose, Pocket Books, New York, 1964. (ghostwritten by Fletcher Flora)
--And on the Eighth Day, Ballantine, New York, 1964. ** (ghostwritten by Avram Davidson)
--The Fourth Side of the Triangle, Ballantine, New York, 1964. ** (ghostwritten by Avram Davidson)
--The Four Johns, Pocket Books, New York, 1964. (ghostwritten by Jack Vance)
--Blow Hot, Blow Cold, Pocket Books, New York, 1964. (ghostwritten by Fletcher Flora)
--The Last Score, Pocket Books, New York, 1964. (ghostwriter unknown)
--Beware the Young Stranger, Pocket Books, New York, 1965. (ghostwritten by Talmage Powell)
--The Copper Frame, Pocket Books, New York, 1965. (ghostwritten by Richard Deeming)
--A Room to Die In, Pocket Books, New York, 1965. (ghostwritten by Jack Vance)
--The Killer Touch, Pocket Books, New York, 1965. (ghostwriter unknown)
--Where Is Bianca? 1966. (ghostwritten by Talmage Powell)
--Who Spies, Who Kills, 1966. (ghostwritten by Talmage Powell)
--Face to Face, HarperPerennial, New York, 1967. ** (ghostwritten by Jack Vance?)
--A Study in Terror, Lancer, New York, 1966. (by Paul W. Fairman and Ellery Queen)
--Losers Weepers, Dell, New York, 1966. (ghostwritten by Richard Deming)
--The Madman Theory, Pocket Books, New York, 1966. (ghostwritten by Jack Vance)
--Shoot the Scene, Pocket Books, New York, 1966. (ghostwritten by Richard Deming)
--The House of Brass, Signet, New York, 1968. (Ellery Queen)
--Cop Out, World, New York, 1968. (Ellery Queen)
--Guess Who's Coming to Kill You? Lancer, 1968. (ghostwritten by Walt Sheldon)
--The Last Woman in His Life, Signet, New York, 1969. (Ellery Queen)
--Kiss and Kill, Dell, New York, 1969. (ghostwriter unknown)
--A Fine and Private Place, Signet, New York, 1971. ** (Ellery Queen) McCall Troubleshooter Series:
--The Campus Murders, Loancer, New York, 1969. (ghostwritten by Gil Brewer)
--The Black Hearts Murder, Magnum, New York, 1970. (ghostwritten by Richard Deming)
--The Blue Movie Murders, Lancer, New York, 1972. (ghostwritten by Edward D. Hoch)
--also see Ellery Queen Novels Ghost Written by Others


Ross, Barnaby, (Ellery Queen)

--The Tragedy of X, 1932. **
--The Tragedy of Y, 1932.
--The Tragedy of Z, International Polygonics, Ltd., New York, 1933.
--Drury Lane's Last Case, 1933.
--Quintin Chivas, Trident Books, New York, 1961. (ghostwritten by Don Tracy)
--The Scrolls of Lysis, Trident, New York, 1962. (ghostwritten by Don Tracy)
--The Duke of Chaos, Pocket Books, New York, 1964. (ghostwritten by Don Tracy)
--Strange Kinship, Pocket Books, New York, 1965. (ghostwritten by Don Tracy)
--The Cree from Minatree, Pocket Books, New York, 1965. (ghostwritten by Don Tracy)
--The Passionate Queen, Pocket Books, New York, 1966. (ghostwritten by Don Tracy)



Collections of Short Fiction
Queen, Ellery,
--The Adventures of Ellery Queen, Frederick A. Stokes, New York, 1934. *
--The New Adventures of Ellery Queen, 1939.
--The Casebook of Ellery Queen, 1945.
--Calendar of Crime, 1952.
--Q. B. I.: Queen's Bureau of Investigation, 1955.
--International Casebook, 1964.
--Queen's Full, 1966.
--Q. E. D.: Queen's Experiments in Detection, World Publishing, New York, 1968.
--The Ellery Queen Omnibus, International Polygonics, New York, 1988. ISBN: 1-55882-001-9 (includes The Adventures of Ellery Queen and The New Adventures of Ellery Queen)


Posted by Iphinoe


제대로 된 리뷰를 쓰려면 시간이 좀 더 흘러야 할 것 같으니 메모성.



1.  조심스레 했던 기대보다 훨씬 좋은 책이었다. 맥락을 잘 알 수 없었던 '악의 기원'과 '킹은 죽었다'까지 좀더 잘 이해가 된 느낌이다(소위 '라이츠빌 시리즈' 장편 연작이 '일곱 번의 살인 사건 Double, Double'로 일단락된 뒤 위의 두 작품이 나왔거든. 이후 'The Glass Village'까지 셋이 매년 한 편씩 연달아 나온다. 그 다음 해 작품은 'Inspector Queen's Own Case'). EQ가 지금 받고 있는 평가보다 여러 의미에서 훨씬 더 도전적인 작가라는 생각이 드는 건 이런 면모들 때문이지. 시대에 대한 고찰의 흔적을 어떤 식으로든, 미숙하건 치기어리건 작품에 담으려고 애쓴 것이 이 세 작품의 특징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악의 기원' 같은 작품은 많고 그중 이건 평작에 속하고, 같은 주제라면 '킹은 죽었다'보다는 피터 디킨슨의 'The Lizard in the Cup'이 낫다. 그에 비하면 여러 모로 더 빼어난 'The Glass Village'가 번역이 안 된 것은... 애석하지만 퀸의 부재 때문이겠지.)


2.  EQ가 특히 헐리우드에서 활동했던 시기에 대해서 알고 나서는, 매카시즘의 시대를 이 두 사람은 어떻게 살았나 궁금해했었다. 더쉘 해밋 같은 사례도 있었고. 게다가 'The Glass Village'가 매카시즘을 은유적으로 다룬 작품이라고 듣고 나니 더 궁금해졌었다. 아직 리와 더네이의 이 시기 행보에 대해서는 크게 들은 바가 없지만, 적어도 동시대인으로서 이 시기를 어떻게 생각했었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3.  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읽기를 좀 꺼려했었다. 캐릭터에 대한 애정도 물론 이유의 하나지만, 더 크게는 퀸이 EQ의 작품들에서의 가벼운 분위기를 세팅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퀸도 없는데 다루는 주제는 매카시즘이라니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만약 꼭 퀸 같은 캐릭터가 등장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매너리즘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편히 볼 수 없었을 것 같고. 그런데 기우였다. 이 소설에는 유머가 넘쳐난다. 키득거리게 하는 정도지만 guilty pleasure 정도는 될 것 같다. 법정에서 머리를 싸매쥐고 고심해야 하는 나이드신 판사님들 캐릭터 너무 다 귀여워=0=


4.  참, 퀸이 등장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작품 내적으로 분명히 있었다. 이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처음에는 퀸을 넣을 요량으로 이야기를 쓰고 있었을 텐데, 어느 시점에서 방향전환을 했으려나. 그리고 퀸이 등장하지 않는 EQ 이야기인 이 작품이 바로 다음 작품인 'Inspector Queen's Own Case'의 탄생에는 어느 정도의 계기를 제공했는지도 꽤 궁금하고. 결국 나중에는 라디오극으로 만들면서는 퀸을 끼워넣은 것 같지만, 그러면 이야기의 집중력이 아무래도 좀 흐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5.  주제의식이 핵심인 작품이다보니 추리소설 속 사건으로서는 비교적 복잡하지 않게, 간결하게 간다. 엘러리 퀸이 좋아하고 즐겨하는 화려한 스타일과는 다르다.



Posted by Iphinoe

1.  EQ가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과 같은 트릭으로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님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었던가?), 그 작품이 진행중이었다면 어디까지 진행되었건 매우 보고 싶다. 비교가 되었을 것 같거든. 'Y의 비극'과 '비뚤어진 집'은 정말 비교가 된다.


2.  사람들이 이 소설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것 같진 않은데, 'Presumed Innocent'도 서술 트릭 작품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 작품의 흥미진진한 점 중 하나는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의 트릭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으로, 이 작품의 서스펜스의 상당 부분은 독자들이 화자를 믿을 수가 없게 한다는 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화자는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기소되었고, 무죄를 주장하면서 법정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데, 정작 이자가 정말 살인범일 수도 있다는 의혹이 스물스물 기어올라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피해자와 내연 관계였던 사실이 있다는 것을 3장에 이르기까지 숨기면서 짐짓 수사에 대한 이야기와 선거에 대한 이야기만 한다. 그런데 그게 꼭 의도적이지는 않을 수도 있는 것이, 누구든 자신에게 자명한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는다. 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니 그 생략이, 침묵이 의도적인 은폐인지 아닌지 독자로서는 영 판단이 안 서는 것이다.

이는 매우 subtle한 장치이고 효과라서 책을 처음 읽으면서 주의를 제대로 기울이고 있는 독자만이 그 뉘앙스를 잡아올릴 수 있고, 또 번역본으로 읽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판본에 따라 그 효과가 느껴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분명 거기 있다. 나로서는 터로가 과연 어느 정도 의도하고 썼는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Posted by Iphinoe

근황

카테고리 없음 2012. 7. 23. 01:36

'QBI'라고, EQ의 단편집이 있다. 몇 년도 작품이더라? 낭비할 시간이 깨알같이 많았던 시절 도서관에서 빌려서 타이핑해 두었는데, 정작 그러면서 읽었던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래서 매우 새로운 기분으로 읽고 있다.


퀸의 단편집은 대저 장편에 비해 매우 발랄하고 전혀 진지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원서만 아니라면.(OTL)


진지하지 않은 만큼 특히 도입부에서 말장난을 너무 심하게 치는 통에, 중1 수준의 어휘들만 쓰고 있는데도 도무지 알아먹을 슈가 업서!!!



대개는 그걸 못 알아들어도 읽는 데 지장이 별로 없긴 하지만, 그래도 기운이 빠진다.


Posted by Iphinoe

소사

afterwards/chitchat 2009. 1. 26. 16:35

  엘러리 퀸의 단편 중에 'My Queer Dean'이라는 것이 있는데, 말하면서 무의식중에 단어의 자음을 바꾸어 발음하는 교수가 등장한다. vanished Bulgarian이 banished vulgarian이 된다던가 하는 그런 건데,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실수라서 학생들만 우왕좌왕하고 조교과 지인들은 웃는 그런 농담으로 묘사된다.


  작가 엘러리다운 조크라서 귀엽게 봤지만 그런 캐릭터 자체는 좀 '용썼네' 류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어제 떠들다 지극히 자연스레 '역도성 식류염'이라고 말해버렸다-_-;; 어찌나 황당했던지 말한 사람 & 듣고 있던 사람 모두 박장대소.


  생각보다 그렇게 현실을 벗어난 설정은 아니었구나; 아무리 그래도 습관적으로 그런다는 건 좀 그렇지만.;;


Posted by Iphinoe

  1타는 이 글이고, acrobat 님께서 그에 해주신 말씀과 관련해서 몇 가지 첨언합니다.




  제 글이 약간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써진 것 같아요. 원래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1. '네덜란드 구두의 비밀'의 문체가 번역본으로 볼 때보다 원본이 아주 살짝 더 얄미운 느낌이더라,
  2. 그게 퀸을 귀엽게 만드는 유머의 원천 중의 하나이고 또 (우연이 아니게도) 내게 먹히는 종류의 매력이다
  3. 고전기 영미권 작가들이 구사하는 유머에 번역하면서 전달이 잘 안 되는 것들이 종종 있는데, 퀸이 구사하는
  유머는 그와 달리 비교적 잘 살아남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더라

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건 어감의 문제라 나 자신은 퀸의 문체가 아주 약간 더 잘난척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100% 확신하기는 역시 어렵다,는 쓰려다 만 말이고요.


  저도 EQ의 유머는 단편에서 좀 더 노골적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도입부에서 불필요한 인용이나 쓸데없이 복잡한 미사여구를 기용해 머리를 어지럽히고 시선을 교란하는^^; 때가 많죠. 그것도 역시나 퀸의 매력 중의 하나고요. 그게 매력이 될 수 있는 근원은 acrobat 님 말씀대로 퀸이 미숙한 젊은이(=도전하는 자)의 심성을 지닌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과,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 기저에 깔린 감성이 자기비하적인 색채를 은연중에 간직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겠지요. 퀸이 시리즈의 흐름에 따라 설정상 나이를 먹을 만큼은 먹으면서도 나이를 먹는 것 같지 않는 것은 전자의 요소가 후자와 면밀히 결부되어 시리즈 전반에 흐르고 있는 덕분일 겁니다. 지금 생각나는 예는 시그마 시리즈 중 가장 나중 작품인 '일곱 건의 살인 사건'인데, '로마 모자의 비밀'에서부터 시작해 엘러리가 몇 살인지를 따져 보면 그 나이가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그게 잘 드러나지 않죠. 캐릭터 본인은 나름 애쓰지만 작가로서의 묘사를 보면 이 인간 (정신)연령이 본래 몇 살인지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


  실은 원 글을 쓰면서 cocky 또는 cockiness 요 단어를 너무나도 쓰고 싶었는데, 요새 양쪽 언어를 분리해서 쓰려고 노력하는 중이라 자제했습니다. 제게 있어 어감상=_=;; 엘러리 퀸 개인이 주는 느낌을 이 이상 잘 설명해 주는 단어가 없더군요. 얄밉다는 단어도 글 쓰고 나서야 생각났고, 실은 제게 있어서는 꼭 정확하진 않아요. 이렇게 되면 심란해집니다.


  그리고 이건 여기까지 acrobat 님께 동의하면 자동적으로 그 다음도 동의하는 게 될 것 같아서 덧붙이는데, 저도 엘러리의 논점일탈하는 인용이나 꼭 애들이 어깨를 으쓱하고 뽐내는 것 같은 수준의 유머(실은 둘은 같은 맥락이죠)를 다 좋아하고, 그 근간에 있는 은근한 자기비하와 그에 공존하는 자신감까지 좋아하긴 하는데, 그 이유를 찾으라면 제 경우는 가벼운 수다가 주는 편안함을 살갑게 여기고 있다는 게 크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퀸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스스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있고 그게 시리즈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잖아요. 자기비하도 같은 맥락이고, 내놓고 뻐기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거죠. 그래서 아무리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아무리 심각해진다 하여도 기본적으로는 유쾌한 정서를 지니고 있고요.


  물론 저도 퀸의 정서에 아주 많이 공감합니다. 기본적으로는.-.ㅡ;;



  그리고 퀸이 홈즈의 정통적 계승자라는 말은 그 자체로 설명이 더 필요한 발언인 것 같은데요. 얼마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명제일까요? 추리소설사에 대해 별로 알지 못하니 그 이상은 말하기 어렵지만, 퀸 경감에 대한 애정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어서.^^ 저도 퀸 경감을 좋아하는 건 사실인데, 퀸 경감 본인을 좋아한다기보다는 퀸 부자가 함께 있을 때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 이상 깊게 들어가 뭔가를 건지지는 못했는데, 어쨌든 그래서 얄팍하다거나 가볍다는 지적도 때로 받아온 퀸의 1기 작품들에 대한 애정을 꿋꿋히 피력하고 있는 것이지요. 더할 나위 없는 오락이 되어주니까요.


Posted by Iphinoe

  클릭
  글을 다른 데서 써서 완성되면 여기 올리자,고 생각했더니 쓸데없이 시간이 들어서 포기. 글의 성격인즉슨 잡담인데 쓸데없이 말이 복잡해지는 것도 싫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앞부분은 다른 데서 쓰기 시작했고, 중간에 여기로 가져와서 말 나오는 대로 올립니다. 아마 그 경계가 어디인지까지 표가 확 날 거예요.

(닫으시려면)




  엘러리 퀸의 1931년작인 '네덜란드 구두의 비밀The Dutch Shoe Mystery'는 퀸의 주무대 뉴욕에 있다는 네덜란드 기념 병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룬다. 시간차 트릭과 밀실 트릭을 변형 혼합하여 수수께끼로 제시하는 작품이고, 다 펼쳐놓고 보면 물적 증거 몇 가지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사건을 풀어간다. (이 정도면 스포일러는 피해갔나=_=) 몇 년 전에 헌책방에서 영문판 페이퍼백이 돌아다니는 걸 보고 사두었는데,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다. 병원 내부 묘사가 너무 심란해지는 부분은 더러 건너뛰기도 했-0-고 사전은 최소한으로만 찾았으나, 그 외에는 비교적 충실하게 읽었다.



  엘러리 퀸의 작품에서 많은 경우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현학을 장난스레 써먹는 그 유머 감각 ― 차라리 '기교'라 부르고 싶은 ― 이다. 으스대고 있는 게 맞긴 한데 말투는 농담 따먹자는 식이어서, 내놓고 잘난척을 하면서도 그걸 귀여운 수준으로 만든다. 독자를 향해 눈을 찡긋해 보이는 것처럼. 이 재주 부리는 말투는 등장인물 엘러리 퀸만 그런 게 아니고 작가 엘러리 퀸으로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다시 말하면 글의 문체가 그렇다는 것이고, 퀸의 글쓰기가 어떤 것인지 원문의 맛을 보고 싶었던 것은 상당 부분 이 사탄같은 말솜씨 때문이었다.


  퀸만 그런 게 아니고, 고전기라고 불리는 시대의 작품들에는 대체적으로 유머가 많이 배어 있다. 코넌 도일와 아가사 크리스티 역시 유머를 살려 글을 썼다. 이들의 유머 중에는 영어라는 언어의 특성에 기대고 있는 것들이 있어서, 원어로 읽을 때에야 비로소 잡아낼 수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존재한다. 영어는 관계사와 같은 수식어를 통해 한 문장에 여러 개의 정보를 담는 게 가능한데, 그 정보들 사이에는 별다른 관계가 없을 때도 많다. 영어로 쓰인 글에서 이를 이용해 유머를 구사하는 걸 종종 보는데, 그런 유머는 상당 부분 어감의 문제이다 보니 문장 구조가 다른 우리말로 옮겨오면 덜 명백해지는 경우가 생긴다.


  엘러리 퀸이 주로 구사하는 유머는 위에 썼듯 성격이 좀 다른 것이어서 번역된 뒤에도 살아남는 종류의 유머 감각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The Dutch Shoe Mystery'를 읽어 보니 꼭 그렇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전부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뻐기는 태도가 전체적으로 톤다운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등장인물) 퀸의 발언보다 (작가) 퀸의 서술을 통해 드러나는 잰체하는 유머가 콕 꼬집어 말할 수 없을 만큼 은근히 조금씩 톤이 낮추어져 있었다. 이 작품이 겨우 퀸의 세 번째 소설이기 때문에 그런 유머가 더 노골적이진 않나 생각하는데, 나야 진즉에 넘어간 상태라 그런 유머 감각에(도?) 낄낄거려 가며 매우 즐겁게 보았다.



  퀸을 왜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늘 말해 왔었는데, 이 독서를 통해 모종의 감을 잡을 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딱히 그 덕분이라기보다는, 오랜 동안 이 문제에 대해 알게 모르게 생각을 해왔고 그 덕분에 형성된 모종의 느낌이 이 시기에 이르러 구체화될 기회를 잡았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이번에 새삼 깨달은 것은 내가 확실히 EQ의 유머감각에 약하다는 것이다. 즐거움을 준다,는 그 이상에 매우 몹시 충실하다. 물론 이건 내 성향하고 퀸이 구사하는 유머하고 맞는다는 전제가 깔린 것이지만, 퀸이 정말 잘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역시, 이 정도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어려서 접한 탓이 큰 듯.




  가외의 생각들.


  1. 이 역시 새로운 건 아닌데, 퀸이 경찰의 초동수사를 참 잘 그려낸다는 생각을 새삼 했다. 상세하고 사실적이다. 내내 농을 하고 있다는 스타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현실감 있게 느껴질 수 있도록 잡아주는 게 바로 이 부분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네덜란드 구두의 비밀'은 넉넉잡아 반 이상의 분량이 초동수사를 묘사하는 데 할애되어 있는데, 이건 국명 시리즈의 전반적인 공통점이고, 더 후기작들까지도 이어지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관계자이면서도 수사의 당사자는 아닌 엘러리 퀸의 동선을 따라다님으로써 경찰이 사건 현장에서 으레 하게 되어 있는 반복적인 활동들에 지면을 지나치게 할애하는 위험은 방지한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는 '프랑스 파우더의 비밀'. 작가 퀸은 탐정 퀸을 적절한 순간에 시체가 발견된 현장에서 빼내어 범죄 현장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올려보낸다. 경찰이 '헤집어놓기' 전에 둘러볼 수 있도록, 적절한 핑계를 달아서.


  2. 의외로 영어가 어렵지 않았다. 물론 단어 수준은 내가 사전 없이 읽을 수 있는 정도를 상회하지만, 문장구조가 까다롭다거나 하는 그런 어려움은 없었다. 내용을 다 알고 읽어서 그런 거 아니냐고 하신다면 ― 당연히 그것도 있겠지요. =) 그러나 단편, 특히 도입부에서 자주 부리는 고도의 기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쩌면 이렇게 느끼는 건 문맥일탈 맥락없는 인용이 장편에선 좀 드물어서인지도-_-


  사족. 이건 퀸 씨와는 전혀 관계없는 얘기. 어찌된 게 요새는 우리말로 글을 써도 문장 구조나 단어 선택이 매우 영어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괴롭다. 이 문제는 해결이 쉽지 않을 듯한데, 왜냐면 해당 경우에 우리글에서의 모범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내 지식이 형편없이 빈약하기 때문.


Posted by Iphinoe

지정 문답

재앙의 거리 2007. 10. 13. 17:11

  acrobat 님 블로그에서 받았습니다. 받고 보니 무슨 제목의 문답인지도 모르고 있군요. 이번에도 역시나 난해한 문답인데, 우야든둥 도전해 보겠습니다. 요새 생산성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일상을 살고 있어서 무어라도 쓸 거리가 주어진 게 반갑습니다. (다 쓰고 났으니 하는 말인데 그다지 내실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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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톤을 받는 5명 절대로 5명! (지정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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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정기적으로 들러주신다고 알고 있는 분들이 워낙 안 계셔서 5명은 고사하고 2명도 어렵겠는데요. 그래도 명희님께서 엑스파일, 혹은 밀레니엄, 혹은 둘 다, 혹은 1013 프로덕션의 전체 작품, 이 중 하나라도 해주실 수 있다면 무한한 감사의 말씀을... 아 이 설레발치는 버릇 좀 고쳐야 하는데... 미리 감사드립니다. (꾸벅)

  그리고 생각해 보니 보내신 분께 되돌리면 안 된다는 법은 없군요. acrobat 님, 역시 엘러리 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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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생각하는『엘러리 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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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달 전 '꼬리 아홉 고양이Cat of Many Tails'와 '재앙의 거리Calamity Town'(아마도;;)를 원서로 구했습니다. 퀸은 재담을 즐기기 때문에, 번역본을 읽으면서 원래는 어떤 표현으로 쓰여진 구절인가 궁금해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지요. 그리고 두 작품은 전반적으로도 그렇거니와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감정의 파고가 상당히 높은 편이라 원본의 묘사를 보고 싶기도 했어요.

  원문을 손에 넣기는 했는데 번역본이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어서, 아직 둘을 대조해 본다거나 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궁금했던 장면들을 찾아보고 나서 든 생각은 역시나 계속 해오던 1. 퀸이 좋다 2. 왜 그런지 꼬집어 말을 못하겠다, 쯤으로 요약할 수 있겠군요. 설문 목록을 보니 아래에서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것들과 같이 구한 'There was an Old Woman'은 '수수께끼의 038 사건'이라는 제목 아래 아동용으로 된 번역으로만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한글본은 그걸로 읽은 적이 있고, 이번에 도입부를 원문으로 조금 읽어본 결과 번역이 (그럴 거라 짐작은 했다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좀더 과하게 창작에 가까운 수준인 것 같더군요. 복잡하고 정신없이 들뜬 분위기로 작품을 몰아가는 퀸 특유의 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된 이야기라, 한두 발짝 떼면 모르는 단어에 걸려 넘어지는 언어로 읽기에 부담스럽긴 하지만, 정식으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러나 그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목표는, 더 최근에 구한 'The Glass Village'입니다. 매카시즘이 휩쓸던 당대 분위기를 반영한 작품이라고 들었는데, 퀸 부자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에 의욕이 좀 꺾이긴 했지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합니다. 어떤 식으로 다루었는지, 얼마나 다루었는지, 모두 알고 싶고 작품을 직접 읽어가면서 알고 싶어요. 지금 제 상태로는 언제가 될지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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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엘러리 퀸』에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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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 탐정 엘러리 퀸에게 감동받아본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몇십 살을 먹었어도 엘러리 퀸의 근본은 변함없이 경박한 청년이니까요. '일곱 번의 살인 사건Double, Double'의 마지막 장면 같은 경우 와닿는 데가 있기도 했습니다만, 그건 탐정 퀸의 마음에 대해서도 있지만 그걸 드러내는 작가 퀸의 방식에도 영향받은 게 커요. 찾아보면 비슷한 예가 더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쟁이 퀸에 대해서. 전 엘러리 퀸이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식을 좋아합니다. '미친 티 파티The Adventure of the Mad Tea-Party'나 중편 '신의 등불'은 딱 적당한 예고, 그만큼 좋은 예가 아닐지는 모르지만 '용 조각 문버팀쇠의 비밀The Dragon's Teeth'도 저는 그런 면에서 좋아해요. 별로 대단한 작품은 아닙니다. 지금 보면 낯간지러운 오리엔탈리즘도 들어 있고, 사건의 진상에도 의외의 요소는 전혀 없다고 해야 할 정도고, 엘러리는 자주 그러듯이 간단하게 처결할 수도 있었던 사건을 괜히 혼자 꼬았다 다시 풀죠. 하지만 그 분위기, 특히 마지막 결말 부분의 서술은 정말 좋아요. (설명을 좀 더 해보려다 실패했습니다.) 장편으로는 가장 최근에 읽었다고 할 수 있는 '꼬리 아홉 고양이'의 범인 체포 씬을 들 수 있겠네요.

  별로 '감동'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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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감적 『엘러리 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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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이 어렵습니다.

  전 탐정이 미스테리를 풀었다는 사실을 작가들이 어떤 식으로 드러내는지 관심을 갖는 편입니다. 이건 특히 고전기 추리소설을 읽을 때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순간을 (그릴 경우) 어떻게 그리는지에 대해서도요. 관심갖는 것치고 잘 기억하진 못합니다만.

  옆에 조력자 겸 관찰자가 있어 그의 시각에서 1인칭으로 이야기가 진술될 때는, 관찰자의 시각과 존재에 따라 그 순간이 다르게 나타나곤 하지요. 홈즈의 경우는 - 그가 오랜 세월 축적해온 범죄 수법과 전과자들에 대한 지식 덕분에 - 사건에 대해 듣는 순간 그 전모를 알아차리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비교적 친절하게 왓슨을 자신의 추리 과정에 참여시키는 편입니다. 특히나 홈즈가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거진 단편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정말 친절한 거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홈즈가 사건을 해결하는 순간에도 왓슨이 곁에 있어 그 광경을 진술해 주는 경우가 많고요. 포와로의 경우는 헤이스팅즈가 그다지 눈밝은 관찰자가 아니고 포와로도 결말에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서건 조력자를 끝까지 잘 활용하기 위해서건 마지막에야 모든 것을 알려주기 때문에 읽는 우리도 마지막에 가서야 포와로가 어느 시점에서부터 사건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헤이스팅즈가 떠난 뒤에는 작품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 신나게 쓰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이렇게 길어질 문단이 아니었어요;;)

  1인칭 조력자가 없는 경우는 그야말로 작품 따라 천차만별인데요, 퀸은 대부분의 경우 퀸의 마음 속을 그대로 그려주진 않아도 추리의 과정은 비교적 투명하게 서술하고, 어느 시점에서 수수께끼의 답에 대한 확신이 섰는지 알려주는 편이죠. 그리고 우리나라에 출간된 작품들만 놓고 봤을 때 열에 아홉은 진상을 깨닫는 그 순간을 잡아주거나, 아니면 그 정황이라도 그려줍니다. (노파심에서. 전 지금 그 유명한 '독자에의 도전'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퀸의 화려한 실패로 악명높은 '그리스 관의 비밀'은 그 대표적인 예고, 단편에서도 이 점은 비교적 잘 지켜져 온 것 같아요. 항상 극적으로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매번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됩니다.

  질문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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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엘러리 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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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관성 있게 풀어 설명할 수가 없으니, 일단 떠오르는 걸 나열해볼까요.

  전 바너비 로스보다 엘러리 퀸을 더 좋아합니다. 따라서 비극 시리즈보다 라이츠빌 시리즈와 국명 시리즈를 더 좋아하지요. 탐정으로서도 드루리 레인보단 엘러리 퀸입니다. 그리고 퀸을 좋아한다고 하기가 무색하게도 퍼즐풀이나 추리대결의 요소보다는 작품 이곳저곳에 깔린 유머와 때로 말장난에 가까울 정도인 문체를 더 좋아합니다.

  결국 관건은 '재미'인 것 같아요. 얘기가 거기서 끝나는 건 아니지만. 전 퀸이 작품 전반을 통해 부리는 재치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것 같다'를 반복하는 것만 봐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건 아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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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에 『엘러리 퀸』이 없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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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정 엘러리 퀸이 없었대도 세상은 돌아갔을 겁니다.^_^ 작가이자 편집자고 출판인으로서의 엘러리 퀸이 없었다면 세상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 두 사람의 명성을 실감하기보다는 듣기만 한 축이니까요. 미국에서는 출판인으로서의 엘러리 퀸의 존재가 잘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제 자신이 잘 알지는 못하고, 일본에서는 작가로서의 엘러리 퀸의 영향력도 상당하다고 합니다만 역시 전 모르는 영역이라서요.

  제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줄긴 했겠지요.



Posted by Iphinoe

소사

afterwards/chitchat 2007. 6. 6. 15:39

  엘러리 퀸은 내가 닮은 점이 있다기에는 너무 잘난 캐릭터지만 - 흥 - 공유하는 점이 하나 있긴 하다. 아마도 '엘러리 퀸의 모험'일 단편집에 나오는 '보이지 않는 연인'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구절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엘러리가 신부에게 자신은 "되지 못한 상상을 잘 하는 편"이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내게는 늘 '돼먹지 못한 상상'으로 기억되는 이 구절-_-;;은 그 뒤에도 엘러리 퀸을 생각할 때 쉽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최근 와서 깨닫고 있는데, 나 역시 그런 편이다-0-


Posted by Iphinoe

  (충실하게 퀸의 팬으로서 썼으니 감안하고 읽으세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동서미스테리북스 출간본으로 읽었습니다.)



  내용 보기

  '꼬리 아홉 고양이'는 여태까지 봤던 그 어떤 퀸의 소설과도 같지 않다. 우선 연쇄 살인은 엘러리 퀸과 같은 고전기 탐정들의 방식으로는 탐정이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상당 부분 제한한다. 연쇄 살인에서 중요한 것은 패턴과 물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용의자 사이를 돌아다니며 피해자의 주변 인물들을 들쑤셔놓고 원한 관계를 추적하고 그것들과 증거와의 연관성을 탐구하는 그런 수사가 이루어질 여지가 거의 없는 것이다. 퀸 부자가 이 사건이 위장된 연쇄살인 사건은 아닌가를 놓고 토론하고, 엘러리가 사건을 도와주겠다고 찾아오는 희생자들의 동생을 선뜻 받아들이는 대신 거리를 두는 것은 두 사람이 고전기 추리소설의 '정통적인' 방법으로 이 사건이 해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기 때문이다('ABC 살인사건'을 연상시킨 내용이었다). 그러나 '꼬리 아홉 고양이'의 아홉 살인 사건은 연막탄 이상의 것이었고, 결국 범인의 윤곽은 우연히 어떤 사실 하나가 노출되면서 드러나게 된다 (= 엘러리의 추리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이 분량 긴 소설의 대부분은 추리와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들이 담당한다.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우르고 짜임새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연쇄살인이라는 얼굴 없는 무작위적 범행이 뉴욕 시 전체에 몰고 오는 공포와 불안이다. 폭동과 공황 상태에 대한 묘사는 과장일 수도 있지만 이 사건이 사람들의 마음 속을 어느 정도로 헤집어놓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엘러리 역시 그 무게를 알기에 스스로 결심한 바를 어기고 사건을 맡는다. 퀸 경감이 이 연쇄살인의 특별전담반을 맡고, 시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 퀸에게 특별수사관의 일을 부탁하는 것은 퀸으로 하여금 일을 회피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한 작가 퀸의 전략이다.;)


  평소의 모습답게 희생자들에서 패턴을 찾아냈지만, 그 패턴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없어하는 엘러리는 범인을 잡아 사건을 종결짓고도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남아 있다는 것 때문에 고심한다. 이는 엘러리가 어쩔 수 없이 아마추어 탐정이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통상적으로 경찰은 범인을 잡아 사건을 종결지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검찰은 공소유지를 해 재판을 만들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퀸은 (다른 작품들에서) 스스로 말했듯 진실을 찾아 범인을 쫓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물론 범인을 쫓는 사람은 누구나 크건 작건 이 기질을 가지고 있지만, 범인을 잡는 일로 밥을 먹고 살지 않는 사람들은 이 기질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크다. (물론 홈즈 같은 괴물도 있긴 하다.)


  추리소설이 근대적이라고 느껴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추리소설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독특한 구조 때문이다. 일상 속에서 발생하는 범죄는 폭력적 균열이다. 탐정은 결국 소설 마지막에 범인을 잡아 일탈을 제거하며 흐트러졌던 세계에 질서를 되돌린다. (인식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증거들을 주워모아 의미를 부여하고 체계를 세운다는 점도 근대적이다.) 그런데 이 사건과 그 전 사건 둘 다에서 엘러리는 스스로는 질서를 부여했다고 생각했으나 곧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은 절망만을 보여주지는 않았으나 그다지 희망적이지도 않다. 엘러리는 다시 지난한 자기 신뢰 회복의 과정을 겪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범인이 체포되고 나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일종의 묘한 흥분과 들뜬 분위기,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딘가 모르게 주변 사람들과 격리되어 앉아 있는 퀸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 인간은 또 기절한다.) 그 전 사건에서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재기 불가능할 타격을 입었던 모습을 보았던 터라, '꼬리 아홉 고양이' 내내 다루어지지는 않지만 저변에 흐르는 퀸의 스스로에 대한 불안감이 사건 해결로 홍수에 둑 터진 것처럼 거대한 흐름으로 터져나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또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야 말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퀸의 절망은 어떤 것이었을까. 물론 두 사건에서 퀸이 패착을 범한 부분은 조금씩 다르고, '꼬리 아홉 고양이'에서 치러진 희생은 퀸으로서는 손쓸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범인으로 기소된 사람의 매 사건에 대한 알리바이를 다시 검토했어야 할 퀸의 의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셀리그먼 박사의 말도 진실이고, 퀸의 자책 또한 진실이다.


  동윤 님 말씀처럼, 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모르겠다. 통상적인 추리소설도 아니고, 하드보일드는 더더군다나 아니며, 책의 앞과 뒤에서 대구를 이루는 퀸의 바닥을 치는 절망은 배경지식 없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이런 도전을 했다는 점에 정말 두 사람(한 사람?)에게 경의를 표한다. 당대에는 퀸의 팬층이 두터웠다는 증거로 생각하련다.(^^)



  (2004. 05. 29)


Posted by Iphinoe

  1956년작입니다. 데뷔작 '로마 모자의 비밀'이 1929년에 나왔고, 마지막 장편이 1971년(A Fine and Private Place)에 나온 것 같;;으니 후기작에 속하는 것일까요. 두찬 님께서 클럽에 올려주신 리스트에 의존하자면 퀸이 직접 쓴 작품입니다.


  전 사실 이 책이 단편집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제목의 'case'에 제멋대로 's'를 붙여버리고는 혼자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퀸 노경감님의 단독 수사집이라! 멋있는 컨셉이 아닙니까? 아버지와의 공조수사를 빙자한 엘러리의 수사담도 재미있지만, 두 사람의 콤비플레이를 보여주려면 아무래도 '범인'인 아버지가 '비범인'인 아들의 그늘에 가리게 되니까요. 엘러리가 조연으로 나오건, 아예 나오지 않건, 아버지 퀸의 독자적인 수사담도 재밌겠다는 생각은 했었습니다. 장편인 걸 알고 나서 조금 기운이 빠지긴 했습니다만, 그건 순전히 원서를 읽어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안타깝다는 정도였지, 기대가 줄어든 건 아니었습니다. 물론 여러 사건을 보는 게 한 사건을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을 수는 있겠지만, 제 생각에 퀸의 진가는 아무래도 단편보다는 장편에서 빛나는 것 같아서요.


  하지만 이 책은 '센터 가의 경감 퀸의 수사담'이 아니라, '은퇴한 센터 가의 경감 퀸의 수사담'입니다. 제 기대가 결정적인 부분에서 배반당한 것이지요. 부하들을 떼거지로 몰고 다니는 당당한 간부급 경찰 퀸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이제 퇴물이 되어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라는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정년퇴직자 퀸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불만이냐고 물으신다면, 불만입니다!!! 불만이고말고요. 리처드 퀸은 더 이상 경찰이 아니고, 전직 경감인 섬처럼 탐정 개업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는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입장에서 뛰어다니게 됩니다. 아마추어지만 적어도 뉴욕 경찰과 최소한의 공조 관계라도 맺고 있었던 엘러리와는 달리 그는 철저하게 무관의 시민이거든요. 게다가 이 소설에서 나레이터가 있다면, 그건 퀸이라기보다는 사건의 관계자이며 퀸과 핑크빛 모드를 연출하게 되는 다른 주인공입니다. 퀸은 자기 목소리를 가질 때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의 소설 진행 시간 동안 그 여자의 눈으로 '보여지게' 됩니다. 즉, 제가 못마땅한 것은, 한마디로 이 소설은 리처드 퀸이라는 캐릭터에게 그가 가졌던 무게와 그동안 수행해준 역할만큼의 대접을 못해주고 있다는 거죠. 명색이 '퀸 경감의 단독 수사'를 전면으로 내세운 소설이 말입니다.^^


  수사 대상이 되는 사건은 상당히 냉혹한 범죄입니다. 태어난 지 이제 겨우 세 달 된 아기가 피살자거든요. 이 아기는 아이를 기를 입장이 되지 못하는 어머니가 낳아, 불법 입양 주선을 전문으로 하는 악덕 변호사의 손을 거쳐 한 부잣집에 입양이 됩니다. 바로 이 아이가 죽은 것이지요. 정황이 애매하기 때문에 사고사인가 살인인가가 논란이 되고, 시신을 처음 발견한 간호사는 살인을 주장하지만, 간호사가 봤던 증거가 범행 현장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경찰은 여자가 환상을 봤다고 단정하고, 검시재판도 사고사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러나 리처드 퀸은 간호사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두 사람은 함께 범인을 쫓습니다..


  리처드 퀸도 경찰직을 떠난 상태인 데다, 파트너 역할을 맡는 이 여자는 철저하게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본격물이라기보다는 모험담에 가깝습니다. 약간은 하드보일드적인 성격과 크리스티의 가벼운 모험물 같은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 같아요. 퀸은 발로 뛰는 편이고, 퀸의 파트너는 퀸을 보조하면서 동시에 보호를 받는 존재가 됩니다. 퀸은 수사의 방향을 잡느라 고전하지만, 단서가 놓여 있는 곳까지는 제대로 찾아갑니다. 그러나 마지막의 추리는 퀸이 아니라 무려 퀸의 파트너의 몫이 됩니다. 퀸은 대부분의 액션을 담당하지만, 처절하리만치 실질적으로 한 일이 없습니다. 게다가 뼈아픈 실책까지 저지르게 되지요.


  그러나 로맨스는 결실을 맺습니다. 제일 큰 스포일러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범인 이름을 대지는 않았으니...;; 퀸의 마지막 대사는 "엘러리가 이 일을 알면 뭐라고 할까?"인데(엘러리는 이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내내 유럽에 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저도 그게 제일 궁금하군요. 그 다음 장편은 1958년작 'The Finishing Stroke'인데, 이 책은 언제나 구해볼 수 있게 될까요..




  p.s. 퀸을 그린 방식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느라 정작 책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못한 것 같네요.=)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려면 범인의 정체를 밝히고 시작해야 하니... 그런 건 다음에 마음이 난다면 생각해보고 싶다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어느 세월에 가능할지.



  (2005. 02. 12)
Posted by Iphinoe

벌써 1년 반이 지나갔군요. 시간 흐르는 게 가끔은 놀랍습니다.


2005년 여름 한겨레21에서는 부록으로 추리소설 특집을 만들었습니다. 특집의 일부로 설문을 실었는데, 국내 여러 추리동호회를 통해 자료를 수집해서, 몇 분의 설문은 그대로 실리고 나머지는 통계에 사용됐지요. 답과 함께 짤막한 설명을 붙여달라고 했었는데, 그게 마음같이 잘 안 되어 설명을 모조리 빼버렸었기에 당연하지만 제 리스트는 통계 데이터로만 들어갔습니다.


저는 목록을 만드는 데 별 관심이 없어서, 사실 그 때가 추리소설과 관련하여 목록을 작성해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특히 개인적인 취향 리스트는 전혀 관심 밖이라, 타인들의 취향에 맞춰 추천을 하는 일은 있어도 제 자신의 취향에 맞춰 우선순위를 매겨본 적은 없었어요. (물론 이 설문이 개인의 취향만을 물어본 것은 아닙니다. 그것만 물어봤다면 답이 달라지는 것들이 있었을 거예요.)


오랜만에 당시 설문에 답한 것을 다시 보니, 역시 평소 생각해본 적이 없던 것이라 그 당시 제 관심사에 많이 좌우됐다는 게 보이는군요. 물론 우선 순위 목록이라는 게 그런 경향이 있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그런 걸 평소에 자주 생각해본 사람은 자신의 취향이라도 두루 돌아보고 대표성을 지닌 것을 고르게 되니까요.


어쨌든 뒤늦게나마 목록을 올립니다. 왜 여기 안 올려두었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설명을 달아 올려야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뭐, 한 번 시도해 보죠.^^ 그러나 설명보다는 해명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길어서 접습니다

1. 가장 사랑하는 추리소설 1~5 :

1 - 장미의 이름 The Name of the Rose (움베르토 에코)
2 - 재앙의 거리 Calamity Town (엘러리 퀸)
3 - 오리엔트 특급살인 Murder on the Orient Express (아가사 크리스티)
4 - 핑거포스트, 1663 An Instance of the Fingerpost (이언 피어스)
5 - 말타의 매 The Maltese Falcon (더쉘 해미트)

이 항목에 답변한 건 저를 아시는 분들은 대충 짐작하셨을 목록입니다. 4번이 의외일 수도 있겠군요. 사실 제가 보기에도 이질적이긴 합니다. 이 항목은 비교적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대표성을 띄는 작가거나 작품이어야 한다는 걸 염두에 두고 골랐었는데, 4번은 거기 염치없이^^ 끼었거든요. 나머지는 작품 또는 적어도 작가가 추리소설사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경우였는데, 4번만 아니니까요.

당시는 '핑거포스트'를 읽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당시 몇 년 간 읽은 작품 중에 개인적으로 주의를 많이 환기시킨 작품이었어요. 물론 지금도 좋아하는 작품입니다만 '사랑하는'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사실 당시에는, 그리고 지금도 '좋아하는'과 '사랑하는'을 구별하면서도 제가 좋아하는 작품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굳이 구분하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특집이 가이드로서 기획되고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비교적 '고전'으로 꼽히는 작가와 작품 중에서 골랐던 것이지요. 그러니 사실 '가장 사랑하는'이라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장미의 이름'은 우리 나라에서의 유명세도 유명세거니와 제게 많은 영향을 미친 작품이고, 언제 어디서부터 펼치건 일단 잡으면 끝까지 읽게 되는 작품이라 당연히 넣었습니다. 전 주변의 팬을 통해 소개받고 좋아하게 된 취향과, 우연한 기회를 통해 저 스스로 좋아하게 된 취향을 구분짓는 편인데, '장미의 이름'은 후자에 속하는 경우라 애착이 좀 더 가기도 하고요.

'재앙의 거리'와 '오리엔트 특급살인'은 이들 작가의 작품 중 좋아하는 게 참 많다,는 전제 하에 소개할 만한 작품, 대표성을 띄는 작품 이 두 가지를 고려하여 뽑은 것입니다. '오리엔트 특급살인'은 아래 '미스터리 초보에게 추천하는 작품'에 넣은 것으로도 그 대표성에 대한 제 평가를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크리스티의 특징을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퍼즐풀이의 대표적인 작품들 중 하나라고 생각해서 넣었습니다. 크리스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변칙적이라 초보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일부러 포와로가 등장한 작품 중에서 골랐다는 것도 인정해야겠습니다. 크리스티의 탐정들 중 가장 좋아합니다.

'재앙의 거리'는 퀸의 여러 가지 매력들을 개중 가장 많이 한꺼번에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골랐습니다. 아무래도 퀸의 1기와 3기 작품들은 다르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재앙의 거리'는 무대가 뉴욕을 벗어나긴 하지만 1기와 3기의 매력을 비교적 아우른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이유로 '중간지대'를 고려해보기도 했었습니다만 그건 추리 외적 요소가 너무 길게 등장해서 마음을 접었을 겁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이유라면, 여기서 '엘러리 스미스'가 스스로를 한 방 먹이는 장면은 읽을 때 커다랗게 웃어젖혔었고 지금도 매번 너무나 유쾌하게 생각하는 대목입니다. 사실 퀸은 시공사에서 낸 스무 권+ 꼬리 아홉 고양이 모두를 비교적 고르게 좋아하고, 크리스티는 작품따라 기복은 있지만 '그 한 권'을 짚기 힘들 만큼 좋은 작품이 많은 작가라, 이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고르기가 쉽지 않아요. 퀸이 크리스티보다 앞선 건 역시 제 선호도를 반영합니다.^^ 4번 항목 '가장 사랑하는 탐정'에 퀸을 적은 것으로 설명이 되겠지요.

'핑거포스트'를 '말타의 매'보다 앞서 적은 건 지금 뒤돌아볼 때 제일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입니다만, '핑거포스트'는 서생...으로서의 제게 몇 번이고 다시 돌아볼 수 있는 무언가를 주었던지라 앞선 자리에 놓았던 것 같군요. '말타의 매'는 언제 읽어도 제게는 그 날카로움과 차가운 문체로 기억되는 작품입니다. 스페이드의 캐릭터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인데, 전 캐릭터에 많이 좌우되는 성향이 있어서 그런 면에서도 뒤로 밀린 것 같군요. 그러나 사실 다시 읽으라면 '말타의 매'일 것 같습니다. 문체의 문제와 관련해서 제게 서늘한 깨달음을 준 작품이기도 하고요. (같은 언급을 스티븐 킹이 한 걸 읽었을 때 꽤 놀랐습니다.)

변명을 해야 할 부분이라면 홈즈가 없다는 것인데요, 홈즈는 단편 위주라서 장편과 같은 비중으로 생각하기가 아무래도 힘들어서, 홈즈와 크리스티 중에서 경중을 고르다 빠졌던 것 같습니다. 석원 님처럼 '홈즈 전집' 이렇게 답변할 수 있는 배포는 없었거든요.^^

설명을 보시면 알 수 있듯이, '사랑해 마지않는'보다는 대충 다 좋아하니 그 중에서 '들어가야 할 만한' 작품을 고른 의미가 더 큽니다. 그것도 세진 님께서 장르별로 고르셨던 것 같은 일관성조차 지니지 못했었죠. 여러 모로 답하기 난감한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언제 어떻게 대답해도 미진함이 남을 것 같아요. 그래서 목록 작성하는 걸 싫어합니다.;;

지금 다시 고른다면? 역시 4번을 제외하고는 아마 비슷하게 갈 것 같습니다. 못내 사랑하는 작품이라는 걸 딱히 꼽기가 어렵더군요. 사족이 이렇게 길어지는 걸 보시면 제가 한겨레21에 보내는 답에 설명을 다 쳐버린 걸 이해하시겠지요.^^



2. 명성에 비해 실망스러웠던 작품 : 검은 탑 The Black Tower (P.D. 제임스)

사실 이건 몇 줄이라도 설명을 적어볼까 마지막까지 고민했었습니다. 만연체 문장으로 소설을 별 사건 없는 고르게 조용한 분위기로 끌고 나가다가 갑자기 마지막에 지리멸렬한 액션이 나오고는 거기서 갑자기 뚝 끊어지는 느낌이어서... 아직도 작품의 유명세를 이해할 수 없는 책의 하나입니다. 똑같이 만연체가 머리를 부담스럽게 하지만 '여자에게 맞지 않는 직업'이 훨씬 나았어요.



3. 최고의 작가 : ...그런 게 있을까요

그런 건 정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있어 최고의 작가'를 고르라고 해도 못 고르는 걸요.



4. 가장 사랑하는 탐정 : 엘러리 퀸

두둥.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아니, 한 탐정을 지목하기는 굉장히 쉬웠습니다. 퀸을 제일 아끼거든요. 거기에는 의문의 여지도 없고, 탐정에 대한 제 애정도에 있어 워낙 독보적인 존재라 제일 간단하게 답을 적어넣었어요. 그러나 그걸 설명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일단 제가 그 이유를 잘 몰라요.-_-

전 물론 퀸의 개삽질-_-, 간단한 사건을 엄청 복잡한 것으로 만들어놓는 그 복잡하고 현란한 수사와 현학적인 머리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런 면이라면 더 발군의 존재가 있지요. 모스 경감이라고요. 애처럼 뻐기기 좋아하고, 그러면서도 많이도 좌절하고, 그런 면모에 걸맞는 장난기 넘치는 화법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인간적이고 정에 약한 면모도 귀엽습니다. 그러나 그런 효과는 홈즈에게서 더 극대화되어 드러나고, 나이에 걸맞게 좀더 성숙하긴 합니다만 포와로도 퀸 못지않지요. 심지어 전 많은 분들이 작가 퀸의 단점으로 지적하시는 의미없는 연애담도 귀엽다고 생각합니다. 스크루볼 코미디 보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런 연애담은 퀸이 아니라도 잘 쓰는 작가는 많습니다. 그럼 그걸 다 합쳐놓은 결과일까요? 그러나 '그걸 다 합쳐놓은 결과'라는 말은 '난 그냥 퀸이 제일 좋아요'나 똑같이 무의미한 설명 같습니다.

두어 가지 떠오르는 건 있습니다. 물론 이건 지금 떠오르는 거니까 내일이면 번복될지도 모릅니다.^^ 하나는 리처드 퀸의 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 퀸'과 '탐정 퀸'을 어느 정도로 분리시켜 생각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동윤 님과 이 설문 이야기하면서 '퀸이 귀여워요' 이런 식으로밖에는 설명이 안나온다고 했었는데^^, 퀸이 귀여울 때가 많긴 한데 그 중 상당 부분은 아버지와 같이 있을 때죠. 퀸이 툴툴거리는 대상도 대부분은 아버지고, 삽질하다 괴로움을 호소하는 존재도 대개는 아버지입니다. 후기에 들어 니키를 (굳이 필요한 것 같지도 않은) 비서라고 붙여준 이유가, 퀸이 뉴욕을 벗어나 돌아다니게 되면서 퀸과 투닥거릴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었거든요. 라이츠빌 시리즈로 대표되는 3기를 국명 시리즈로 대표되는 1기보다 높게 평가하시는 분들 틈에서 '그래도 1기도 좋아요'하고 박박 우기는 이유 중의 하나도, 1기에는 리처드 퀸이 있어주기 때문입니다. 퀸 경감의 캐릭터를 좋아해서라기보다 엘러리가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빚어지는 효과를 좋아한다고 봐야겠죠.

그리고 '작가 퀸'과 '탐정 퀸'의 문제는... 이건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제가 '작가 퀸'의 장점을 '탐정 퀸'에 투사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서요. 1인칭 작품이 아니다 보니 두 존재를 분리시켜 생각해야 하기는 하는데 '작가 퀸'이 '탐정 퀸'이 겪은 일을 3인칭으로 쓴다, 가 이 시리즈의 기본적인 모토이니(아무리 뒤로 가면서 이 전제가 망가진다 하여도), 제 혼란도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릅니다. (사실 이 뒤에는 '작가 퀸'을 창조한 두 사람이 또 따로 있기 때문에, 생각하다 보면 점점 복잡해집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퀸의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유쾌한 정서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건은 진지하게 바라보고 다루지만 유머가 늘 잘 살아 있고, 가장 무거운 축에 속하는 '열흘 간의 불가사의'조차도 후반부 바로 전까지는 아무리 상황을 이리저리 꼬아 심각한 장면을 연출한다 하여도 모든 에피소드가 웃음을 선사하는 데 있어 실패하는 법이 없죠. 굉장한 장점입니다.



5. 가장 인상적인 악당 : 모리어티 교수

이건 좀 힘들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범인'이라면 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적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악당'이라면 실제로 제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모리어티 교수밖에는 적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어요. 그게 당시 생각입니다만, 지금 생각해도 다른 답변이 나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른 분들 답변을 보고 하는 말입니다만 뤼팽을 꼽으신 동윤 님 선택이 인상적이긴 했는데, 전 뤼팽이 보통 사람과는 좀 다른 윤리의식을 가진 모험가에 가깝다고 생각(물론 악당은 악당입니다만)하는 편이라...



6. 가장 훌륭한 결말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결말 :

가장 훌륭한 : 열흘간의 불가사의 Ten Days' Wonder (엘러리 퀸)
어처구니없는 : 탐정을 찾아라 Catch Me If You Can (패트리셔 매거)

이건 정말 주관이 개입된 답변입니다.^^ 사실 '훌륭한 결말'이라면 제가 '훌륭한'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설명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겠지요. '열흘간의 불가사의'는 시리즈물에서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을 했다는 점에서 늘 놀랍고 감탄을 자아내는 작품이었습니다. 퀸을 쓰는 두 작가의 도전적인 면모는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백과사전적인 위대함이 자주 논의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아쉽게도 늘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열흘간의 불가사의'는 그런 증거로 제시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예일 겁니다. 물론 이건 한정된 제 경험 안에서만 하는 이야기입니다. 영미권의 평론가들이나 그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니까요.

'탐정을 찾아라'는 제 기대를 너무 배반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고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건 정말 변하지 않을 거예요. 제목이 '범인 찾기'라는 추리소설의 기본 명제를 뒤튼 것이기 때문에, 전 당연히 이 작품이 '범인 찾기'를 비틀어 적용했기를 기대했고, 그래서 탐정 찾는 과정이 추리소설에서 범인 찾듯이,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전기 퍼즐풀이에서 범인 찾듯이 나와주길 기대했습니다.

이건 이 작품을 원제로 알고 보았다면 하지 않았을 기대입니다. 'Catch me if you can'은 '탐정을 찾아라'가 함축하고 있(다고 제가 보았던)는 메시지 따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어쨌든 기대를 해버렸던 저는 서스펜스물인 이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점점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탐정의 존재 때문에 점점 자기 목이 죄어오는 듯한 그 불안감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리 잘 그려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요. 이 소설의 주제는 '공포 때문에 스스로 무리수를 두고 만 주인공'인데 - 소설 마지막에 정체를 드러낸 탐정이 직접 그렇게 말하지요 - 그 무리수로 향하는 과정이 그다지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 않고 그냥 '정말 무리다'는 생각밖에 안들었으니까요.



7. 가장 완벽한 범죄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And Then There Were None (아가사 크리스티)

이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골랐습니다. 좀... 멍청한 질문이라고(죄송) 생각됐던 터라... 쿨럭;; 이 소설의 특성을 생각할 때 너무도 당연한 선택이지요. 흠흠. 세진 님께서 제프리 아처의 '한 푼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를 들어주신 걸 보고 아차 또 있었군 하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후자의 경우는 범죄인지 아닌지조차 사기친 당사자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사기물이었으니 전자에 만족할래요.



8. 가장 멋진 대사

지노와 나는 모두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모든 악몽의 결론은 바로 이것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그이고 그가 나이며, 밤의 어두운 느낌 속에서는 희망과 공포가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

(의혹 Pleading Guilty, 스콧 터로우)

이건 번역본의 주어진 문장 그대로를 좋아합니다. 원본을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다가오는 의미도 조금 다르고 결정적으로 덜 멋있었어요. (쿨럭;;) 전 좀 원본주의자의 면모를(자랑스럽지는 않지만) 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건 몇 안 되는 예외에 속합니다.

그 이상은 따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9. 배신하지 않는 작가(가장 믿을 만한 작가) : 딕 프랜시스, 스콧 터로우

딕 프랜시스는 제게 있어 상업적인 작가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느껴지는 작가입니다. 논란거리가 될 만한 부분도 없고, 주제의식이 돋보이는 것도 아니고, 소재는 특별하지만 그 외에는 정말 재미에 충실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재미만 추구하다 무언가가 희생되는 것도 아니고요. (여기서 할란 코벤이 떠오르는 이유는?) 매 권마다 주인공이 달라지기 때문에 시리즈물로서의 개성을 찾기도 막연하지요. 그래서 언제 읽어도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집게 되는 작가입니다. 그리고 그만큼은 틀림없이 가져다 줍니다.

스콧 터로는... 요새 어쩌다 보니 이 작가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많이도 했습니다만... 그 역시도 비슷한 의미에서 안정감 있는 타율을 보여주는 작가입니다. 추리소설사에 한 획을 그을 만큼 빼어난 작품은 없지만, 실망을 주거나 아쉬움을 남기는 일도 없습니다. (터로의 작품들에서의 감정의 과잉에 대한 이야기를 한 건 아쉽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 특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작품 따라 읽는 사람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였어요. 그걸 아쉬운 점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런 작가들이 더 있겠지만, 아직까지 제게는 이 두 사람이 전부입니다. 그런 작가가 더 있다면 정말 환영합니다. 추리소설은 근본적으로 제겐 오락거리인데, 팬의 마음으로 보기 시작하면 가볍게 잡기가 점점 힘들어지거든요. (퀸은 그런 측면에서도 불가사의하며 단연코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팬으로서 바라보면서도 가볍게 집을 수가 있단 말이지요.)



10. 가장 잘된 추리(미스터리) 영화 : 니고시에이터 :D

이건 전적으로, 당시 '스팅'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적어넣은 겁니다. (그래서 웃는 아이콘이 달렸었;;습니다.) 단연코 '스팅'입니다. 하지만 그건 미스터리 영화가 아니라 케이퍼물이군요. 그러고 보니 케이퍼물은 추리물인가요 아닌가요?;;



11. 우리나라에 꼭 소개되어야 할 작품(절판된 작품 포함) : 베크 시리즈, 펜슬러 시리즈, 에드워드 D. 호크의 작품들

이건 추리문학사에서 중요하니 소개되어야 한다!보다, 제가 읽고 싶은 작품들로 골랐습니다. 그러니 더 묻지 마세요.^^ 베크 시리즈는 '웃는 경관'의 모든 게 너무나 인상깊었고, 같은 경찰물들 중에서 리버스 경감 시리즈만큼 사람 힘을 빼는 어두운 분위기도 없고 87분서보다 묵직한 시리즈라 정말 전작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모든 작품이 '웃는 경관'급이라면, 번역되어 나온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겁니다.

펜슬러 시리즈는 제가 늘 고맙게 생각하는, 농담같이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는 작품들입니다. (겨우 두 권 읽었습니다만..) 오해를 살까봐 덧붙이는데, 위의 표현은 '범죄의 무게를 가볍게 만든다'와 결코 동의어가 아닙니다. 'Death in a Tenured Position' 같은 작품은 사회파 추리소설 못지않게 신랄하면서도, 그걸 결코 무겁지만은 않게 짚고 있거든요. 유머의 맛이 잘 살아 있는 작품들이라, 그래서 좋아합니다. 그래서 더 보고 싶어요. 그런데, 그 유머가 번역하기 매우 힘든 언어적 유희가 많아서, 과연 번역될 날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크리스티나 홈즈도 그런 식의 영어 유머가 많은데 보면 번역할 때 그런 맛이 거의 사라지더라고요.

지금 적으면서 생각하니, 펜슬러 시리즈에 끌리는 이유를 잘 파면 제가 퀸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상당 부분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제가 좋아하는 점을 여러 모로 공유하는 것 같아요. 퀸도 유머가 잘 살아 있는 작품이고, 그 유머는 시덥잖을망정 특정 대상을 겨냥해 아픈 데 찌르는 그런 빈정거림은 결코 아니거든요. 그리고 둘 다 수다스런 작품이기도 하고요.

에드워드 D. 호크는 poirot 이상준 님을 통해 소개받고 궁금했던 작가였습니다. 큰 의미는 없었어요.



12. 가장 좋아하는 국내추리소설(1번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면) : 알라 할림

...국내추리소설을 얼마나 안 읽었는지부터 고백해야겠습니다. '알라 할림'은 괜찮은 작품입니다만 일단 무대부터가 우리나라가 아니지요.; 반칙이었습니다. 반칙이 아니라면 변칙은 되겠군요. 그리고 실은 아주 좋아하는 작품도 아닙니다. 경현 님께서 많이 지적하시는, 주인공을 통해 아는 티를 내는 경향이 좀 있어요.^^ 그러나 그 정도의 완성도를 지닌 작품이라면 분명 읽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받고 있는 대접(완전히 무시됐지요)보다는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소설입니다.



13. 미스터리 초보에게 추천하는 작품 셋(순위 없이) : 도둑맞은 편지, 말타의 매, 오리엔트 특급살인

셋 다 기본입니다. '도둑맞은 편지'는 포의 작품이니 당연히 들어가야 하고, 그 중에서도 추리소설에서 중요한 트릭과 시선의 문제를 촌철살인의 정확함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 '모르그 가의 살인'보다 좋아합니다. '말타의 매'는 하드보일드의 시초이자 그 중에서도 뭐랄까, 돋보이는 맛을 지닌 작품이고요. '오리엔트 특급살인'은 설명이 더 필요할 텐데, 일단 고전기에서 한 작품을 골라야 한다는 걸 전제로 깔고, 도일와 크리스티 사이에서 고심을 했었습니다. 퀸은 제 개인적으로야 매우 좋아하지만, 입문자에게 처음으로 추천을 하는 경우라면, 시초이자 완성형인 코넌 도일와 백과사전적으로 트릭과 플롯을 거의 모두 커버한 크리스티 중에서 고르는 게 맞다고 생각했거든요.

홈즈 시리즈에서 작품을 뽑지 않은 것은 홈즈의 경우 대표작이라 할 만한 '그 한 작품'을 고르기가 힘들어서도 있고, 단편 위주이다 보니 포가 어느 정도 커버한다고 생각해서이기도 합니다. 크리스티도 '그 한 작품' 고르기는 힘들지만, 퍼즐 미스터리의 진수를 골라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둘 경우에는 답이 비교적 명백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오리엔트 특급살인'입니다. 그리고 의외의 범인이라는 점에서도 돋보이는 작품이니까, 기본적인 요소는 다 갖춘 셈이지요.

그렇게 쓰다 보니 '오리엔트 특급살인'이 가장 나중에 들어갔는데, 셋 중에서 읽을 순서를 정하라면 '도둑맞은 편지' - '오리엔트 특급살인' - '말타의 매' 순입니다. 추리문학사적으로도 맞고, 작품 경향상으로도 그게 어울리지요.



14. 나는 추리소설을 좋아한다. 그 이유. : 응집력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

사실 그 이유는 아직도 찾는 중입니다. 동윤 님의 답변('욕망'을 다룬다는 점에 주목하신)이 많이 도움이 되긴 했습니다만 그걸로 충분치가 않아서요.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 추리소설의 의미를 설득할 때 가장 맞는 답변이긴 합니다만 제 개인적인 동기까지 설명하진 못하는 것 같아요.



15. 그리고 할 말이 남았다.

없었습니다.

Posted by Iphin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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