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놓은 채 해를 넘기게 될 것 같아, 근친 한 분께서 입원하셔서 수발을 들게 된 김에 들고 갔던 책입니다. 도무지 작정하고 달려들지 않으면 안 읽게 될 것 같아서요. 어려운 단어도 많고 말투는 배경이 대학 아니랄까봐 얼마나 까다로운지... 사실 읽으면서 많이 킬킬거리기도 했습니다. 하버드 영문학과가 배경이고, 나오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교수기도 하여, 다들 어찌나 현학적으로 sarcastic하던지(이 단어에 적당한 우리말을 못 찾겠군요) 도무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거든요.


  이 소설의 배경은 1970년대로, 하버드 영문학과에 아직(이겠지요?) 여자 교수가 하나도 없을 시절입니다. 여자 교수에게 tenureship(종신고용계약쯤으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을 주는 조건으로 장학금 제의가 들어오는 게 사건의 발단이지요. 우리 나라는 대개 교수 등급을 조교수-부교수-정교수로 나누는 걸로 알고 있는데, 몇 년 단위로 계약을 맺어 교수를 고용/재임용하는 미국 시스템에서 tenured professor는 이변이 없는 한 그 대학에 정년퇴임할 때까지 눌러앉게 하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정교수 중에서도 그동안의 학문적 기여를 인정받아 안정된 위치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면 될까요.


  아직 여성 운동이 공공연하게 배척당하는 시기이고, 특출나게 보수적(이라고 책에서 묘사됩니다)인 하버드 내에서 이런 조치는 당연히 하버드 영문학과 교수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들은 고르고 골라서 미국 내 알려진 영문학과 여성 교수들 중에서도 여성 운동과 전혀 관련이 없고 그런 문화를 배척하는 사람과 접촉해서는 tenureship을 주고 들어앉히지만, 동료로서 인정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은근한 따돌림의 분위기 속에서 당혹스러워하던 신임 교수는 곧 자기 평판을 위협하는 스캔들과 만나게 되고, 뉴욕의 한 대학 영문과 교수로서, 과거 이 신임 교수와 같이 대학원 생활을 했던 주인공 케이트 팬슬러는 이런저런 사연으로 여기 개입하게 되지요. 줄거리 소개가 너무 들쭉날쭉이군요.


  케이트 팬슬러는 이 소설(팬슬러 장편으로 읽어본 게 처음입니다)의 매력을 거의 혼자 끌고 나가는 것 같습니다. 머리도 좋고 유능하고 돈 걱정 없고 오지랖 넓은, 약간은 구식 세계 - 물론 1950-60년대에 대학을 다닌 연배의 사람인 만큼 이 '구식'을 미스 마플 같은 '구식'으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만 - 에 머물러 있지만 자신의 편견에 대해 그것이 편견임을 인정하고 다른 편견들과 함께 대화할 만큼 열려 있는 사람으로 나오거든요. 편안한 수다를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아 여기저기 코를 들이밀기도 하고, 빨리 돌아가는 두뇌 탓에 늘 화제가 널뛰기를 해서 다른 사람들을 애먹이지만 주위 사람들을 물들이는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인물입니다.


  주인공 케이트가 순간순간 머릿속에 떠올리는 생각들을 그대로 서술해주기 때문에, 소설은 저처럼 원서로 읽느라 진땀을 빼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불친절하게도 대화 중간에 다른 이야기가 불쑥 튀어나와 읽는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문화적 배경 없이는 이해할 수 없을 코멘트들이 아주 가볍게 스쳐지나간다거나 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덫을 놓습니다. 일부러 사전을 옆에 두지 않고 읽었는데, 만약 그랬더라면 모르는 단어 찾다가 시간이 다 갔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제가 놓친 소소한 재미들도 많았겠지요.


  추리소설로서는 사실 크게 '추리'할 만한 요소는 없습니다. 다 읽고 나서야 하는 말이지만 약간은 꽉 차 있는, 수다스럽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계에 던져졌다 나온 기분입니다. 주어진 배경이 배경인 만큼 양성 평등 문제와 사회적 계층의 문제, 편견과 갈등의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어 현실과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만, '하버드'라는 '무대'가 얼마나 이상하고 특수한 조그만 우주인지가 끊임없이 강조되다 보니, 약간은 초공간 여행을 한 것 같은 기분도 들거든요. 좋은 수다를 좋아하는 저 같은 사람으로서는 약간 김빠지는 결말만 빼면 대체적으로 만족스럽습니다. 만족스럽다고 말하기에는 제 영어 실력이 너무 부족해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지만요.


  총평 : 꽤 재미있었습니다. 유쾌한 소설입니다만, 편견과 닫힌 생각이 얼마나 사람을 말려죽일 수 있는가,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가, 사람들이 얼마나 이기적으로 무신경하게 남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가 등등에 대해서는 노골적일 만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부분도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는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영문학 하는 사람답게 문장을 끊어 쓰면서 중간중간 장식해주어, 영어공부 하는 입장에서는 재미있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더군요. 현학적으로 sarcastic했다는 건 꼭 강조하고 싶군요. 특히 프롤로그를 장식하는 세 통의 편지 - 하버드 영문학과에 여자 tenured professor를 받게 생겼다는 개탄조의 내용 - 는 거의 배꼽을 잡고 웃다 넘어갈 지경입니다.


  덧붙임 : 만약 우리나라에 번역본이 나온다면, 번역하실 분이 그 오묘한 느낌을 살리느라 꽤 애먹으실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아가사 크리스티나 셜록 홈즈도 원서로 보면서 번역으로는 채 다 살리지 못하는 영어 특유의 재담을 자주 발견했었는데. 전 아무래도 언어유희에 약한 것 같습니다. 우리말로도 그런 언어유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작품이 있을까요? 문학 쪽에 약한지라 추천 부탁드립니다.




  추가분 : 1. 등장 인물들이 얼마나 '고상하게' 말하는지 직접 보시길 :
  "What did you think of her family? I've just met a brother, an experience not to be repeated."
  "Thought wasn't something I bothered wasting on her family, and I honestly don't think Janet did either."


  2. 스포일러
  결국 자살로 사건이 종결되는 게 조금 맥빠지긴 하지만, 그 사실이 되려 이 책이 집중했던 '사회적 살인'이라는 테마를 처절하게 부각시켜준 점을 고려하면 적절한 선택이긴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 전반에 걸쳐 묘사되는 여성 차별 문제가 단순한 시선 교란 트릭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여부를 궁금해하면서, 주인공이 '동기'에 매달리는 과정을 함께 따라갔던 저로서는 맥이 탁 풀려버리긴 했지만요. 사실 전, 처음부터 부각된 하버드의 여성 문제가 misdirection일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 아래 전남편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아닐까 점찍었었거든요.



  (2004. 12. 19)


Posted by Iphinoe

사이드바 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