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우리나라에 잘 알려졌다고도 할 수 있고 잘 안 알려졌다고도 할 수 있는 법정소설 작가 스콧 터로Scott Turow에 대한 글로, 추리소설과는 관계없는 작은^^ 동호회에 소개하는 의미로 올렸던 글입니다. 2007년 1월 27일 엔트리로 되어 있군요.

  이 글과 아랫글인 The Burden of Proof 리뷰는 어떤 의미에서는 연결되어 있다고도 해도 좋을 글입니다. The Burden of Proof를 읽은 건 2006년 여름이었는데, 읽자마자 감상을 무척이나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잘 써지지가 않아서, 어영부영하다 6개월 이상을 끌었습니다. 그 지경이 되면 보통 대충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들을 1, 2, 하고 나열해 가며 할 수 있는 한 끄집어낸 뒤 던져버리는데, 이건 한 편의 '글'로 쓰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던고로 쓰지 못하는 채로 질질 끌었습니다. 그러다 위에 말씀드린 동호회에 추천하고 싶은 것들을 소개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 게 계기가 되어서, 가볍게 쓰기 시작한 터로에 대한 글이 지금 이 장문의 글로 첫 결실(?)을 맺고, 내친 김에 The Burden of Proof에 대해서까지 쓰게 된 거지요.

  역시 활자의 압박이 클 것 같아 접습니다. 이 태그 쓰는 데 재미들렸는지도 모르겠네요.

  펼칩니다

  스콧 터로우Scott Turow는 87년에 데뷔하여 지금까지 두 권의 논픽션과 8편의 장편 소설을 출간한 작가입니다. 가장 최근작인 Limitations(2006)를 제외하면 시계처럼 정확하게 3년에 한 권씩 소설을 냈지요. 우리나라에는 논픽션 두 권을 합쳐 모두 다섯 권이 번역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작가의 작품이라면 우리나라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아마도 '열정 속으로, 하버드 로스쿨One L(2004)'일 것입니다. 이 책은 '법과 대학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1996년에도 출간되었지요. 다른 제목으로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비 리그와 조기유학의 붐을 타고 어느 정도 입소문을 얻은 것으로 압니다. 애초에 2004년 출간은 그런 시류에 부합하려는 의도가 컸을 겁니다. 국제변호사가 꿈이라는 아는 애 집에 갔더니, 참으로 빈약했던 그 녀석 책장에도 이 책이 꽂혀 있더군요. 저자가 하버드 로스쿨 출신이고, 자신의 경험을 에세이 식으로 적었기 때문에, 이 책은 '닥터스' 류와는 다르게 논픽션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네, 스콧 터로우는 변호사입니다. 시카고에서 검사보로도 일한 적이 있고, 지금도 로펌 체인에서 파트너로 일하고 있습니다. 추리소설 작가로 명성을 얻은 이후로는 주로 무료변론에 주력하고 있다고 합니다만, 일선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2003년에 나온 'Ultimate Punishment(우리나라에는 '극단의 형벌'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는 자신이 경험했던 사형수 변론, 그리고 일리노이 주 사형 위원회 소속으로 2년 동안 사형제의 실효성 여부를 검토하는 작업에 참여했던 경험을 토대로 사형 제도애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낸 책입니다.

  전 'One L'을 읽어보지 못해서 이 논픽션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지만, '극단의 형벌'은 사형 제도에 관한 고찰로 매우 좋은 책입니다. 우리나라의 사형 제도에 대한 논란은 당위성에 대한 공박으로만 흐르는 측면이 있는데요(사회적 비용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존치론 측에서만 주로 사용되는 논거지요), 이 책은 사형 제도의 사회적 비용이라던지, 현실적인 한계와 위험 등등을 미국 현실에 확고하게 발을 딛고 서술합니다. 너무나 미국에만 적용되는 이야기여서, 되려 한국의 경우에 비추어 볼 수 있는 측면이 확연해질 정도지요. 터로는 자신이 검사와 변호사로서 사형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가를 묘사하면서, 두 건의 무료 변론에서 사형수에 대한 변호를 맡고 변론을 치러낸 과정을 통계를 곁들여서 개인적 경험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도록 서술하고, 거기에 일리노이 주에서 주지사의 결단으로 공공의 비용을 들여 2년 동안 사형제의 장단점 조사를 목적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에서 어떤 작업을 어떻게 했는지 보고하는 방법을 통해 사형 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도 사형제 폐지론자와 존치론자 사이를 왔다갔다한 경험이 있다고 하고, 그걸 진솔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이 우리나라에 출간될 때 소개글에서는 작가가 사형 제도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고들 했고 온라인 서점 독자 리뷰를 봐도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이 책을 쓸 때 터로는 폐지론자로 자기 입장을 자리매김했던 것 같습니다. 일리노이 주 사형 위원회의 최종 권고안도 그런 내용이고요.



  논픽션 이야기를 먼저 한 것은 이 작가 개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조금 소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작가 자신이 법을 다루는 직업에 몸담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터로는 존 그리샴과 흔히 비교되곤 한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둘 다 미국에서는 베스트셀러 작가에 속합니다만, 우리나라에선 그리샴의 유명세가 워낙 엄청나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교조적이고 대중적인 그리샴보다 터로우가 그리는 인물들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터로우는 법정소설 작가로 불립니다. 그 맥락에서도 존 그리샴과 비슷하지요. 추리소설에는 여러 장르가 있습니다만, 법정소설은 변호사나 검사, 판사 등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중심 인물로 등장하는 소설들을 가리켜 부르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법을 '다룬다'는 건 주로 해석의 문제를 말합니다. 형사는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겠지요.) 반드시 법정이 무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법의 여러 측면들을 소설의 뿌리로 삼는 그리샴과는 달리, 터로우는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주인공일 뿐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전혀 별개일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 터로우가 출간한 소설의 목록을 소개합니다. 번역본이 있는 경우는 번역본 제목을 달았습니다. 아직 절판 안 된 건 따로 설명을 붙였고요.

  1987 Presumed Innocent ('무죄추정' '의혹')
  1990 Burden of Proof
  1993 Pleading Guilty ('증발')
  1996 The Laws of Our Fathers
  1999 Personal Injuries
  2002 Reversible Errors ('사형판결', 2005. 아직 유통중입니다)
  2005 Ordinary Heroes
  2006 Limitations

  그의 모든 소설은 시카고 근교로 설정된 가상의 킨들 카운티Kindle County를 무대로, 다양한 법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위에 썼듯이 현재까지 8권이 출간되었고, 저는 국내에 번역된 3권과 90년에 나온 Burden of Proof를 읽었습니다.



  데뷔작인 '무죄추정'은 개성 강한 작품입니다. 호불호를 떠나 읽으면 잊히지 않는 작품이고, 스타일과 소재 모두가 센세이셔널해서 다 읽을 때까지 읽는 사람을 붙들고 놓지 않는 그런 소설입니다. 변호사 자격증을 딴 후 검사로서만 경력을 쌓아온 30대의 젊은 지방검사보가 자기가 수사하던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기소되게 된다는 초반부 내용은 설정만 들어도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나요? 후반부는 재판에 할애되어 있습니다만, 전후반부 모두 사건이 흘러가는 양상보다 그걸 주인공인 '나'가 어떻게 소화하는가가 소설의 핵심으로 다뤄집니다. 어떤 분^^께서 제게 하신 말씀대로, 문장 하나하나마다 에고가 넘쳐나는 소설이에요. 이 작품은 1인칭을 굉장히 영리하게 활용합니다. 1인칭 시점은 주인공이 독자에게 말을 거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독백이기도 하지요. '무죄추정'은 한 사람의 진술 안에 그 두 가지를 교묘하게 섞으면서 무려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를 독자들이 신뢰할 수 없게 만듭니다.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도 만들어졌습니다. 이것도 꽤 잘 만든 스릴러입니다. 해리슨 포드 주연으로 어느 정도 유명했기 때문에, 보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다음 작품인 'Burden of Proof'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좀 보입니다. '무죄추정'에서 후반부의 핵심 인물 중 하나로 주인공의 변호를 맡았던, 킨들 카운티의 잘나가는 변호사가 주인공입니다. '무죄추정'에서는 형사전문변호사로 등장해서 속을 알 수 없는 인물로 그려졌었지요. 여기서는 그의 가정사와 개인사가 큰 줄기를 이루고, 그의 변호사 생활 동안 줄곧 가장 중요한 - 여러 의미로 - 고객이었던 의뢰인이 기소의 위협을 받는 데 따른 변호사로서의 업무가 엮여듭니다. 이 의뢰인은 주인공의 매부이기도 해서, 두 가지 이야기를 하나로 유지해 주지요. 출장에서 돌아와 아내가 아무 예고없이 자살한 것을 발견한 주인공의 모습으로부터 소설이 시작하기 때문에, 초반부는 아내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 없어 방황하는 주인공의 모습과 아내가 자살한 연유를 추적하는 내용이 중요하게 그려집니다만, 갈수록 매부 회사 쪽의 비중이 늘어납니다.
  이 소설의 문체는 3인칭으로 시점을 바꾸었습니다. 여기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캐릭터가 아마도 터로가 가장 아끼고 자신과 동일시하는 인물이 아닌가 합니다. 읽다 보면 작가와 등장 인물의 거리가 매우 좁다는 게 느껴지지요. 그리고 이 인물은 킨들 카운티 시리즈를 통틀어 꾸준히 재등장하면서 자신의 자취를 작품 어딘가에는 꼭 남겨놓는 캐릭터거든요. '무죄추정'의 주인공과는 달리 독자들이 공감하기도 쉬운 인물이고요. 작가가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늘 꿈꾸는 일탈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걸 데뷔작에 이어 여기서도 보여주는데요, 이 주인공은 그 일탈조차도 꼭 자기처럼 지극히 온건하고 차분한 방식으로 겪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약점은 감상적인 결말인데요, 이 이야기는 있다 아래서 다시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매우 온화한 사람이라 - 아내의 죽음으로 나름의 중년의 방황을 겪습니다만 - '무죄추정'이 주었던 밀도있는 분위기는 조금 떨어집니다.

  그 다음 작품인 '증발'은 저를 결정적으로 터로의 독자로 여기게 만든 작품입니다. '무죄추정'도 정말 좋은 작품이지만 소재가 워낙 센세이셔널하고 주인공이 처한 위치가 너무 특수해서, 한 작품으로서야 더할 나위 없지만 작가의 경향을 짚어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감이 있어요. 더군다나, 두 작품 사이에 낀 'Burden of Proof'를 읽고 난 뒤로는, '증발'이 거둔 성과가 아니었다면 터로가 소포모어 징크스를 극복하고 안정감 있는 타율을 보여주는 작가의 길로 접어들기는 조금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증발'은 소송변호사지만 거대기업인 항공사의 일을 주로 받아 관리해온 로펌 소속의 민사변호사를 주인공으로 삼습니다. 여태까지 두 작품을 통해 그려온 킨들 카운티의 한 구석으로부터 조금 벗어난 다른 무대지요. 소속 변호사 하나가 자신들이 관리하고 있는 기금에서 거금을 횡령하고는 모습을 감추자, 로펌의 운영위원들은 파트너의 위치에 있지만 최근 몇 년간 별볼일 없이 처신해온 주인공을 불러들여 그를 추적하는 일을 맡깁니다. 이 기금에 워낙 많은 것이 얽혀 있는 터라 되도록이면 법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일을 조용히 처리하려는 것이지요. 주인공은 그 일을 해나가면서 자신이 이 일에 개인적인 감정을 투영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몇십 년간 차분히 쌓여와 이제 자신을 엄청난 무게로 내리누르는 인생의 공허를, 그 허무를 해결하는 문제를 이 일과 동일시하게 된 겁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 길을 걸으면서 인간적으로 신뢰했던 사람들의 이면을 보게 되고, 어떤 선택을 합니다.
  이 작품의 결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매우 기억에 남습니다. 충격적이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어떤 의미로는 기대하는 감정도 남지요. 터로는 일탈의 감정을 여기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그 때문에 각각 매우 다른 이 세 소설에 어떤 일관성이 부여되는 듯합니다. 그리고 '증발'은 그걸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정이입할 수 있을 차원에서 그리고 있습니다.

  'The Laws of Our Fathers'는 터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Burden of Proof'에 등장했던 인물들 중의 하나가, 여전히 법을 다루는 직종에는 있지만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위치에서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이것도 터로가 그리는 킨들 카운티의 특징 중 하나인데요, 법 주변에서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위치를 옮겨 가며 그 주변에서 맴도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현실에서의 시간과 소설 속에서의 시간이 같이 흐르면서, 그 동안 검사가 판사가 되고, 형사법정에서 일하던 사람이 민사법정으로 가기도 하고, 임기가 찬 판사는 퇴직하고 스캔들로 옷을 벗기도 하고 감옥에 가기도 합니다. 그 속에서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며 중추가 되는 인물은 'Burden of Proof'의 주인공 스턴입니다.
  이 작품은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다만 기대와 더불어 우려가 되기는 합니다. 터로는 여성 캐릭터를 그다지 잘 그려내는 편은 아니거든요. (솔직히 이건 모든 남성 작가를 대할 때 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들어가는 부분이라 잘 그려주면 다행이지만 못 그린다고 제게 있어 평가가 깎이는 법은 없습니다.) 주인공이나 그 주변 인물을 형상화할 때 특수한 상황 속에서 그리면서 그 안에서 보편적인 모습을 끄집어내는 데 능한 사람인데 여성 캐릭터를 다룰 때는 이게 무척 약합니다. 이래저래 여성 캐릭터가 많은 'Burden of Proof'도 그런데, 이 작품은 여자가 주인공입니다. 남성의 시선이 들어간 여자 주인공을 보는 것만큼 불편한 일도 별로 없거든요. 하지만 기대를 걸고는 있습니다. 출간된 지 10년이 지난 작품에 대해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긴 하지만, 잘 해주었길 빌어요.

  2002년에 나온 'Reversible Errors'는 '극단의 형벌'의 출간 시기를 보면 아시겠지만 - 그리고 이 책 내에도 언급이 나옵니다 - 터로가 일리노이 주 사형 위원회 일을 하고 있던 비슷한 시기에 쓴 작품입니다. 위원회가 구성될 무렵 이미 집필에 들어간 상태였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세트로 묶여다니는 비운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만, 사실 'Reversible Errors'는 사형 제도에 대한 소설은 아닙니다. 사형수가 플롯 전개에 핵심 인물이긴 하지만 그가 주인공이라 보기도 어렵고요. (그래서 번역판 제목 대신 원제를 적었습니다.) 'Reversible Errors'는 사형을 눈앞에 둔 사람 때문에 과거의 사건을 재고해보게 된 상황을 바탕으로 당시 이 일에 관련되었던 사람들, 현재 그 일에 관련된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를 병치해 그리면서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거나 화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추리의 요소가 섞여 있긴 하지만 장르 문학으로서의 요소가 매우 약하고, 터로도 인정한 바대로 주가 되는 건 사랑 이야기입니다.
  분위기가 좋은 소설이긴 한데 결말이 너무 치우쳐 끝나서 그게 많이 아쉬웠습니다. 한 커플은 잘 되고, 다른 한 커플은 갈라서는데, 그 이유가 마치 타인을 믿어주느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식으로 흘러서 아쉬웠어요. 신뢰와 용서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쌓아온 개인적인 관계의 시간과 그 무게가 뒤에서 작용한 것인데 말이지요. 이것 역시 다시 언급하게 되겠지만 터로의 감상주의가 오버한 부분이라, 읽는 사람 따라 감동받을 수도 있는 부분이었지만 제게는 지나친 나머지 저를 튕겨내는 그런 요소였습니다.



  터로는 일상의 무게를 벗어나는 일탈을 꿈꾸는 사람들을 잘 그립니다. 그 정체를 '무죄추정'에서 '희망'이라는 말로 표현하지요. 무언가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무언가 나아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 그리고 그런 실낱같이 가벼운 무게에 기대는 사람들의 황폐한 심사를 그리는 데 있어 탁월한 재주를 갖고 있습니다. '무죄추정'에서 최종판결이 내려지면 자기가 집어넣은 죄수들이 드글드글한 감옥으로 가야 할 지도 모르는 주인공이 밤마다 잠못이루고 집을 서성거리는 대목이라던지, 'Burden of Proof'에서 아내의 자살이라는 선택이 남편인 자신에 대한 비난이라고 느끼는 주인공이 스스로를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에 대한 묘사 - 그 역시 밤마다 집구석을 배회하면서 머릿속을 구체화할 수도 없는 생각들로 가득 채웁니다 - 는 정말 탁월합니다. '사형판결'에서도 주인공은 너무 많은 책임감을 짊어지고 그 무게에 짓눌린 인물이죠. 지금까지 읽어본 바로는 이게 가장 빛을 발하는 작품이 '증발'이었기에, 저는 개인적으로 '증발'을 터로의 작품들 중 맨 위에 놓습니다.
  이 재주는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합니다. 일단 감상주의로 흐를 함의가 너무 커요. 살짝만 너무 나가도 감정이 흘러넘쳐서 질펀해지고, 결과적으로 혼자 취해 마구 우는 술친구를 옆에서 말짱한 정신으로 보고 있는 기분이 되지요. 그래서 저는 터로가 1인칭 시점을 쓸 때를 더 좋아하는데, 3인칭으로 쓰면 과도한 감상주의가 작가가 절제를 못한 결과가 되는 반면, 1인칭으로 쓰면 감정이 마구 흘러넘쳐도 일견 '나'의 개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도 제가 좋아하는 '무죄추정'과 '증발'은 1인칭 시점이고, 좀 넘친다고 생각한 'Burden of Proof'와 'Reversible Errors'는 3인칭 시점입니다. 현재까지의 출간작을 반 읽은 시점에서 이렇게 딱딱 둘로 나뉜 결과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다른 작품이 빨리 읽고 싶어져요.

  터로를 '좋아하는 작가'라고는 못하겠습니다. 그러기엔 살짝 낯간지럽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 중 어떤 것들을 아주 많이 좋아하는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장점이 곧 단점이 되는 그 경계가 분명한 작가이기도 해서, 다른 작품을 계속 찾아보게 만드는 동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작품은 어떻게 썼나 궁금해 하게 만들거든요. 그리고 킨들 카운티라는 배경에 충실히 남아 있어 주어서, 법원을 중심으로 각자의 작은 원을 그리는 주변 인물들이 긴 시간에 걸쳐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이렇게 긴 글이 될지 몰랐는데 지금 좀 놀라고 있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소개글이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마지막으로 터로의 공식사이트를 소개합니다. URL이 (당연하게도) http://www.scottturow.com 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출간된 '극단의 형벌' 본문에 이 사이트의 여러 페이지가 각주로 들어가 있는데요, t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지 번역본에서는 t를 다 하나씩 빼버렸더랍니다-0- 읽다가 엄청 웃었습니다.

Posted by Iphin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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