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 문답

재앙의 거리 2007. 10. 13. 17:11

  acrobat 님 블로그에서 받았습니다. 받고 보니 무슨 제목의 문답인지도 모르고 있군요. 이번에도 역시나 난해한 문답인데, 우야든둥 도전해 보겠습니다. 요새 생산성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일상을 살고 있어서 무어라도 쓸 거리가 주어진 게 반갑습니다. (다 쓰고 났으니 하는 말인데 그다지 내실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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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톤을 받는 5명 절대로 5명! (지정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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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정기적으로 들러주신다고 알고 있는 분들이 워낙 안 계셔서 5명은 고사하고 2명도 어렵겠는데요. 그래도 명희님께서 엑스파일, 혹은 밀레니엄, 혹은 둘 다, 혹은 1013 프로덕션의 전체 작품, 이 중 하나라도 해주실 수 있다면 무한한 감사의 말씀을... 아 이 설레발치는 버릇 좀 고쳐야 하는데... 미리 감사드립니다. (꾸벅)

  그리고 생각해 보니 보내신 분께 되돌리면 안 된다는 법은 없군요. acrobat 님, 역시 엘러리 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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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생각하는『엘러리 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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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달 전 '꼬리 아홉 고양이Cat of Many Tails'와 '재앙의 거리Calamity Town'(아마도;;)를 원서로 구했습니다. 퀸은 재담을 즐기기 때문에, 번역본을 읽으면서 원래는 어떤 표현으로 쓰여진 구절인가 궁금해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지요. 그리고 두 작품은 전반적으로도 그렇거니와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감정의 파고가 상당히 높은 편이라 원본의 묘사를 보고 싶기도 했어요.

  원문을 손에 넣기는 했는데 번역본이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어서, 아직 둘을 대조해 본다거나 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궁금했던 장면들을 찾아보고 나서 든 생각은 역시나 계속 해오던 1. 퀸이 좋다 2. 왜 그런지 꼬집어 말을 못하겠다, 쯤으로 요약할 수 있겠군요. 설문 목록을 보니 아래에서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것들과 같이 구한 'There was an Old Woman'은 '수수께끼의 038 사건'이라는 제목 아래 아동용으로 된 번역으로만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한글본은 그걸로 읽은 적이 있고, 이번에 도입부를 원문으로 조금 읽어본 결과 번역이 (그럴 거라 짐작은 했다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좀더 과하게 창작에 가까운 수준인 것 같더군요. 복잡하고 정신없이 들뜬 분위기로 작품을 몰아가는 퀸 특유의 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된 이야기라, 한두 발짝 떼면 모르는 단어에 걸려 넘어지는 언어로 읽기에 부담스럽긴 하지만, 정식으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러나 그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목표는, 더 최근에 구한 'The Glass Village'입니다. 매카시즘이 휩쓸던 당대 분위기를 반영한 작품이라고 들었는데, 퀸 부자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에 의욕이 좀 꺾이긴 했지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합니다. 어떤 식으로 다루었는지, 얼마나 다루었는지, 모두 알고 싶고 작품을 직접 읽어가면서 알고 싶어요. 지금 제 상태로는 언제가 될지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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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엘러리 퀸』에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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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 탐정 엘러리 퀸에게 감동받아본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몇십 살을 먹었어도 엘러리 퀸의 근본은 변함없이 경박한 청년이니까요. '일곱 번의 살인 사건Double, Double'의 마지막 장면 같은 경우 와닿는 데가 있기도 했습니다만, 그건 탐정 퀸의 마음에 대해서도 있지만 그걸 드러내는 작가 퀸의 방식에도 영향받은 게 커요. 찾아보면 비슷한 예가 더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쟁이 퀸에 대해서. 전 엘러리 퀸이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식을 좋아합니다. '미친 티 파티The Adventure of the Mad Tea-Party'나 중편 '신의 등불'은 딱 적당한 예고, 그만큼 좋은 예가 아닐지는 모르지만 '용 조각 문버팀쇠의 비밀The Dragon's Teeth'도 저는 그런 면에서 좋아해요. 별로 대단한 작품은 아닙니다. 지금 보면 낯간지러운 오리엔탈리즘도 들어 있고, 사건의 진상에도 의외의 요소는 전혀 없다고 해야 할 정도고, 엘러리는 자주 그러듯이 간단하게 처결할 수도 있었던 사건을 괜히 혼자 꼬았다 다시 풀죠. 하지만 그 분위기, 특히 마지막 결말 부분의 서술은 정말 좋아요. (설명을 좀 더 해보려다 실패했습니다.) 장편으로는 가장 최근에 읽었다고 할 수 있는 '꼬리 아홉 고양이'의 범인 체포 씬을 들 수 있겠네요.

  별로 '감동'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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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감적 『엘러리 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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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이 어렵습니다.

  전 탐정이 미스테리를 풀었다는 사실을 작가들이 어떤 식으로 드러내는지 관심을 갖는 편입니다. 이건 특히 고전기 추리소설을 읽을 때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순간을 (그릴 경우) 어떻게 그리는지에 대해서도요. 관심갖는 것치고 잘 기억하진 못합니다만.

  옆에 조력자 겸 관찰자가 있어 그의 시각에서 1인칭으로 이야기가 진술될 때는, 관찰자의 시각과 존재에 따라 그 순간이 다르게 나타나곤 하지요. 홈즈의 경우는 - 그가 오랜 세월 축적해온 범죄 수법과 전과자들에 대한 지식 덕분에 - 사건에 대해 듣는 순간 그 전모를 알아차리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비교적 친절하게 왓슨을 자신의 추리 과정에 참여시키는 편입니다. 특히나 홈즈가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거진 단편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정말 친절한 거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홈즈가 사건을 해결하는 순간에도 왓슨이 곁에 있어 그 광경을 진술해 주는 경우가 많고요. 포와로의 경우는 헤이스팅즈가 그다지 눈밝은 관찰자가 아니고 포와로도 결말에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서건 조력자를 끝까지 잘 활용하기 위해서건 마지막에야 모든 것을 알려주기 때문에 읽는 우리도 마지막에 가서야 포와로가 어느 시점에서부터 사건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헤이스팅즈가 떠난 뒤에는 작품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 신나게 쓰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이렇게 길어질 문단이 아니었어요;;)

  1인칭 조력자가 없는 경우는 그야말로 작품 따라 천차만별인데요, 퀸은 대부분의 경우 퀸의 마음 속을 그대로 그려주진 않아도 추리의 과정은 비교적 투명하게 서술하고, 어느 시점에서 수수께끼의 답에 대한 확신이 섰는지 알려주는 편이죠. 그리고 우리나라에 출간된 작품들만 놓고 봤을 때 열에 아홉은 진상을 깨닫는 그 순간을 잡아주거나, 아니면 그 정황이라도 그려줍니다. (노파심에서. 전 지금 그 유명한 '독자에의 도전'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퀸의 화려한 실패로 악명높은 '그리스 관의 비밀'은 그 대표적인 예고, 단편에서도 이 점은 비교적 잘 지켜져 온 것 같아요. 항상 극적으로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매번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됩니다.

  질문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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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엘러리 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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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관성 있게 풀어 설명할 수가 없으니, 일단 떠오르는 걸 나열해볼까요.

  전 바너비 로스보다 엘러리 퀸을 더 좋아합니다. 따라서 비극 시리즈보다 라이츠빌 시리즈와 국명 시리즈를 더 좋아하지요. 탐정으로서도 드루리 레인보단 엘러리 퀸입니다. 그리고 퀸을 좋아한다고 하기가 무색하게도 퍼즐풀이나 추리대결의 요소보다는 작품 이곳저곳에 깔린 유머와 때로 말장난에 가까울 정도인 문체를 더 좋아합니다.

  결국 관건은 '재미'인 것 같아요. 얘기가 거기서 끝나는 건 아니지만. 전 퀸이 작품 전반을 통해 부리는 재치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것 같다'를 반복하는 것만 봐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건 아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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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에 『엘러리 퀸』이 없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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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정 엘러리 퀸이 없었대도 세상은 돌아갔을 겁니다.^_^ 작가이자 편집자고 출판인으로서의 엘러리 퀸이 없었다면 세상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 두 사람의 명성을 실감하기보다는 듣기만 한 축이니까요. 미국에서는 출판인으로서의 엘러리 퀸의 존재가 잘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제 자신이 잘 알지는 못하고, 일본에서는 작가로서의 엘러리 퀸의 영향력도 상당하다고 합니다만 역시 전 모르는 영역이라서요.

  제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줄긴 했겠지요.



Posted by Iphin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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