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소사

afterwards/chitchat 2009. 4. 3. 13:25

  1. The Reader 영화를 보았는데, 책에선 직접적 언급을 가능한 한 회피했던 수치심에 대한 이야기는 더 많이 하고, 책에서 많이 했던 죄의식(의 전이)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안 했다는 게 첫인상이었다. 더 묵혀 봐야 분명해지겠지만, 그래서 마지막 대화가 약간 오락가락했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전후 첫세대가 전쟁 세대에 던지는 질문을 주제로 삼았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책은 그보다는 더 복잡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 1인칭 나레이션이 있을까 없을까 매우 궁금했는데, 답은 얻었다.^^



  추가 (스포일러 있음)

  씨네21의 리뷰를 방금 읽었는데,

  '달드리와 헤어는, 50년 동안 숨겨온 비밀을 ‘집필’이라는 행위로 털어놓는다고 마무리짓는 원작의 결론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구현할까 고심했다. “마이클은 딸에게 한나와의 사연을 들려줌으로써 고해성사를 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해방시킨다.”(달드리) “원작은 대화의 강력한 수단으로서의 문학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도 ‘대화’를 사용했다.”(헤어) 이 선택이 과연 효과적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마이클이라는 독일 전후 세대(2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의 곤혹스러움은, 한나라는 1세대보다 3세대와의 화해를 향해 나아가는 쪽으로 좀더 비중이 커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집필을 하는 것과 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행위는 의미가 같지 않으니까.
  실은 나도 약간은 같은 생각을 했기에.


닫기



  2. 그나저나 보고 싶었고 볼만했고 보고 있었는데 정말 피곤해서 눈꺼풀이 진짜 무거웠다. 집중을 못했으니 당연히 놓친 게 있을 것 같은데, 책을 읽고 본 탓으로 볼 건 다 봤다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레나 올린이 두 번 나온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_=)



  3. 말 나온 김에, 한두 시간마다 '아 머리가 돌지 않아'를 중얼거리며 카페인을 찾아 나서는 내 모습이, 레몬즙을 공급해야 총기가 돌아오는 (그것도 10분간!) 자포드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장면에 웃는 게 아니었어.


Posted by Iphinoe

소사

afterwards/chitchat 2009. 1. 26. 16:35

  엘러리 퀸의 단편 중에 'My Queer Dean'이라는 것이 있는데, 말하면서 무의식중에 단어의 자음을 바꾸어 발음하는 교수가 등장한다. vanished Bulgarian이 banished vulgarian이 된다던가 하는 그런 건데,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실수라서 학생들만 우왕좌왕하고 조교과 지인들은 웃는 그런 농담으로 묘사된다.


  작가 엘러리다운 조크라서 귀엽게 봤지만 그런 캐릭터 자체는 좀 '용썼네' 류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어제 떠들다 지극히 자연스레 '역도성 식류염'이라고 말해버렸다-_-;; 어찌나 황당했던지 말한 사람 & 듣고 있던 사람 모두 박장대소.


  생각보다 그렇게 현실을 벗어난 설정은 아니었구나; 아무리 그래도 습관적으로 그런다는 건 좀 그렇지만.;;


Posted by Iphinoe

  1.   한동안 폭스채널의 노예처럼 살다가 (주로 몽크Monk와 본즈Bones 때문) 로앤오더Law & Order 2시즌부터 제대로 꽂혀서 한 달 넘게 The "soul" of L&O에 허우적대고 있는 중. 하지만 SVU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덜 먹힐 스타일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3시즌 방영 도중에 콜드 케이스Cold Case에 방송 시간을 내주고 자정으로 밀렸었다. 그러고는 더 할 계획이 없어 보였는데, 최근 7시 반 타임에 3시즌 재방송을 해주고 있어서 들며날며 보고 있다.

  역시, 다시 보는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정자세로 앉아 몰입하게 만드는 에피가 아주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중간중간 집중이 날아가는 경험도 솔찮이 하고는 있다. 재미가 없다는 뜻은 아닌데, 여러 번 보면서도 몰입도가 저해받지 않는 작품이 워낙 드문 것 같아. 그런 의미에서 엑스파일과 웨스트윙이 내 안에서 정말 대단한 작품인 것. 물론 그 둘 사이에서도 XF와 TWW의 격차는 꽤 크다.

  그럼에도 배우들, 특히 고정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subtle한 연기 할 때는 정말 좋다. 그런 점 때문에 결국 또 보고 또 보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정말 힘있는 에피소드들이 종종 터져주는 것 때문에.




  2.   L&O 3시즌 첫방 끝나고 나서 그 파트너쉽들이 아까워서 (→ 이 말은 좀 설명이 필요한데, 그러니까 로앤오더는 고정 캐릭터 여섯 체제로 움직인다. 역할에 따라 경찰 쪽에 셋이 있고, 검찰 쪽에 셋이 있는데, 3시즌 끝나면서 고정 캐릭터 둘이 한꺼번에 바뀐다) 만만한 팬픽션닷넷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아뿔싸, 갑자기 EFC에 불이 붙었다. 이 시리즈는 사실 그다지 좋아하는 수준까진 아니었는데, 거기서 놀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좀 뒤져보다, 나와 프로파일링 & 시리즈에 대한 태도가 모두 일치하는 작가들을 생각외로 은근히 많이 발견한 것이 자극이 되었던 것 같다. B급 SF인데, 기본 설정이나 캐릭터들의 성숙도 때문에 성인 시청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물론 내 취향과 비슷해 보이고 길지 않은 작품들만 취사선별해서 읽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원래 드라마에선 아주 가끔 꼬리를 드러냈던 기묘한 아름다움을 증폭시킨 팬픽들을 간간이 만날 수 있다.

  그 덕분에 시리즈 자체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늘었고, 그러다 어제 드디어 내가 이 드라마를 몇 편 녹화해 둔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0-; 잊고 있었다. 오매불망 다시 보고 싶어하는 단 하나의 에피소드는 녹화를 못 했었지만, 원래 시리즈가 어땠었는지 거진 잊어가고 있던 터라 어제 한 번 다시 걸어봤다.

  어설프긴 좀 많이 어설프더라 ㅎㅎ. 원래 이렇게 내놓고 미래세계인 SF는 스타트렉처럼 아예 배경이 다르거나 아니면 돈을 많이 붓지 않는 이상 티가 나기 마련인데, 파이널 컨플릭트Earth: Final Conflict는 돈 없어 보이고 배경도 지구인 데다 트와일라잇 장르적인 성격이 섞인 터라서 화면이 구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좀 과하다 싶을 만큼 형광톤이 되는 것도, 그 때 볼 때는 잘 몰랐는데, 그 뒤에 다른 것들 보다 보니 어설픈 특수효과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 같거든. 배우들도 연기의 맥을 잘 잡지 못해 어설픈 것이 눈에 보인다. 4시즌이면 할 만큼 해왔고, 2-3년 이상 레귤러였던 배우들도 수두룩한데 연기하면서도 다같이 조금씩 어색해 하는 것 같았다OTL..



  원래 EFC는 드라마 그 자체보다도 그 설정에서 오는 가능성 때문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라서, 그 어색함에 몸이 근질거려 가면서도 재미는 있었다. 그런 시리즈들이 좀 있다. 다크 엔젤Dark Angel도 그랬고, 로스웰Roswell도 그랬었고. Roswell은 원작이 소설 시리즈였고, DA는 잘 모르겠지만 EFC는 뒤에 소설로도 좀 나온 모양인데 그건 기회 되면 읽어보고 싶다. 소설로는 훨씬 근사하게 뽑혀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서. 전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이 묘사되기 때문에, 무대를 조금만 바꾸어도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고, 담길 수 있는 이야기도 많다.




  3.   중요한 건 가장 마지막에. 엑스파일에 대한 생각은 신기하게도 최근 줄어들었다. 나 자신의 원인도 있겠지만, 아마도 큰 부분은 I WANT TO BELIEVE 탓이 아닌가 한다. 이 영화의 존재가 은근히, 의식 못하는 사이에 많은 것을 바꾸었다.

  M&S에 대한 묘사 때문일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영화가 closure이긴 한데 - 후속편이 나오고 아니고를 떠나서 말이다 - proper closure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이건 내 문제일까? 내 문제일지도 모른다.


Posted by Iphinoe

팬픽 잡담

afterwards/chitchat 2008. 11. 5. 21:52

  최근 팬픽션닷넷에서 놀고 있습니다. 제가 접했고 캐릭터 또는 스토리에 일부나마 관심을 가져봤던 미드가 생각보다 꽤 많더군요. Popular나 Earth: Final Conflict처럼, 우리나라에는 방송되지 않았거나 방송되었어도 거의 이야기되지 않았던 시리즈들도 있습니다.


  보통 TV시리즈 팬들은 웹에 팬픽션 아카이브를 별도로 가지고 있죠. XF에겐 고사머, 스타게이트 SG-1은 스타게이트팬닷컴이 있고, 로앤오더는 아포크리파에 주로 모이는 것 같더군요. 로스웰은 종영 전에는 크래쉬다운이 대표적이었는데 요즘은 활동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버피버스야 버피월드가 꽉 잡고 있지요. 그러니 팬픽션닷넷에서 접할 수 있는 정도를 가지고 경향성을 운운한다는 건 좀 부정확한지도 모르겠지만, 목록을 죽 훑으면서 관심가는 걸 골라내다 보면 모종의 일관성이랄까 경향 같은 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스타게이트나 엑스파일은 일단 대작들이 많고, 스케일이 큰 것들도 자주 나옵니다. 로앤오더는 의외로 비그넷 위주더라구요. EFC는, 최근에 찾아보고 놀랐는데, 시리즈의 메인 안타고니스트라 할 수 있는 산도발에 대해 양가적이거나 꼭 전향적이진 않다 해도 은근한 태도를 지닌 팬픽들이 제법 있더군요. 사실 원작에서는 그렇게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로 다뤄지진 못했었어요. (아쉬웠던 부분이라...)


  팬덤에서 팬픽이 나름대로의 경향을 수립해 가는 걸 보면 가끔 재미있을 때가 있는데, 스타게이트처럼 매 회가 포스트 에피 팬픽을 불러서 이게 독립장르화된다거나 아니면 엑스파일처럼 케이스파일/로맨스물의 분리 성향이 두드러진다던가 하는 장르적인 경향성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팬픽을 통해 캐릭터들에 대한 특정 프로파일링이 고착되는 현상이 제일 흥미로워요. 스타게이트 팬덤에서 잭과 다니엘 페어가 보이는 양상은 너무 정형화되어 재미가 없을 지경이고, 어느 드라마에서나 캐릭터에게 드리우는 트라우마가 강한 특정 에피소드들은 수없이 반복되죠. 심지어 겨우 2시즌 하고 끝났던 Popular에서도 커플링이 거의 정해져 있더라고요.


  집단적으로 형성되는 독립적인 우주란 (종종) 재밌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함께 창조한다는 게 굉장히 흥미롭고 매우 강렬한 경험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투입과 산출의 과정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런 경우는 더 그렇죠.


  (결론은 없습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Posted by Iphinoe

The Tudors 2시즌 10화


The Tudors 2시즌 10화



  앤 불린의 처형날 아침. 이른 시각부터 성당을 찾은 크롬웰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곁눈을 들어 예수상을 보는 저 각도 죽인다. 자기가 한 역할의 의미와 무게를 모르지 않아 죄의식으로 온 것이긴 하지만, 정작 저 시선은 죄책감의 발로라 부르기에는 무언가 어긋나는 데가 있다. 굳이 말하자면 되레 모종의 원망이 담긴 눈길이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 표현인데 보는 순간 이해가 되었다. 절묘하다.


  토머스 크롬웰과 불린 가의 결별은 앤 불린의 몰락에 중대한 원인 제공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이 부분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모르지만 (7&8화를 못 봤다), 어찌됐든 9화에서 크롬웰은 왕의 총리대신으로서 이들 세력에 대한 조사와 재판을 총괄한다. 왕의 총애에 따라 상승과 몰락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근세 궁정에서 정치적 경력을 쌓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도박이었다. 크롬웰 역시 몇 년 지나지 않아 같은 길을 걷는다.


Posted by Iphinoe

  당신들의 조국 (1992)
  로버트 해리스 / 김홍래 역
  랜덤하우스 (2006)



  어떤 기대를 갖고 책을 집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교묘하게 현재 내게 필요했던 바와 맞아떨어지는 이야기였다.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독일은 동유럽을 제외한 유럽의 대부분을 거대 유럽 연합으로 묶어 자국의 우산 아래 둔다. 동유럽 전선에선 아직 소모전이 계속되지만 미국과 독일은 냉전 체제로 들어가고, 20여년이 지난 64년에 이르러 국면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제 두 나라는 데탕트의 기치를 내걸고 정상회담을 준비한다.


  이 이야기가 추리소설이 되고 보니,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는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대개는 근사치에 가까운 답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생각을 해보진 않았다). 도입부를 조금 읽다 보면 관건이 되는 음모가 무엇인지 밝혀질 비밀이 무엇인지, 이들이 모르는 것이 무엇이고 아는 것이 무엇인지도 대충 파악이 되고. 그걸 풀어나가는 방식이 중요한 것이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닌 것이다. 역사대체소설이 주는 모종의 편안함은 그런 데서 나온다. 그럴 마음이 없다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이다.


  수동적으로 이 이야기를 읽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나, 제 2차 세계 대전 또는 나치 독일에 대한 지식이 평균 이상인 사람이라면 실제 인물과 사건들의 후일담을 작가가 어떤 식으로 그려나가는지, 자기 자신이 갖고 있던 이미지와 어떻게 합치되고 어긋나는지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으리라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는 보통 퍼즐추리조차도 게으르게 읽는 사람이고 (트릭 있으면 걸려들고 진상이 밝혀지면 감탄한다), 최근은 그런 경향이 더 심해져 있기 때문에, 다른 부분에서 얻는 흥미와 재미로도 차고 넘쳤다.


  내게 이 소설의 재미=_=와 가치는 나치 독트린이 사회 전역에 걸쳐 지배적인 헤게모니를 차지한 사회를 실질적으로 구현했다는 것이다. 20년이라면 시스템은 정착할 기회를 얻는다. 전쟁이 일상이 되거나 아니면 일상이 전쟁을 비켜날 수 있었다면 더더군다나 그렇다. (이 소설은 후자다.) 총통 개인에 대한 신격화 노래가 학교 점심 시간에 일상적으로 불리는 것도 한국에서 그리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1984'와 '나치 시대의 일상사'를 합쳐놓은 것 같은 분위기라는 느낌을 받았다. 경찰국가에 대한 비교적 세세한 묘사도 주의를 끌었다. 경찰이 세 계급으로 나뉘어 업무를 나눠 갖는 방식이라든지, 그들 사이에 서열이 있긴 하지만 반목과 경쟁이 존재한다든지 하는 눈에 띄는 것들부터 시작해 도청을 비롯한 대중 감시가 일상화된 시대의 풍경과 그런 환경과 집단적 사고 속에 개인들이 어떤 식으로 적응해 가는가 하는 것도. 주목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소소하게 스쳐 지나간다.


  그에 대한 까발림이 다른 것도 아니고 서류 더미 사이에서의 탐색으로 시작한다는 내용은 내가 예상치 못했던 류의 필요 충족이었다. (다른 것도 애초에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때문에 베를린 기록문서보관소에 대한 그리고 그 안에서의 일에 대한 묘사는 은근히 재미있었다.


  이 이야기의 미스테리가 무엇으로 밝혀질지 알아듣게 되고부터는 결말의 모양새가 조금씩 궁금해지기 시작했는데 - 해피엔딩일 것인가 아닌가 - 그런 점에서는 좀 너무 모범적이었다.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투덜거림이고, 사실 그렇다 해서 불만이라던가 아쉽다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다. 그저 조금만 다르게 나갔더라도 나쁘지 않았을 거라는 정도일까.


  해서 여운이 남는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몰입해 읽었고 덕분에 만족스러웠다.




  p.s. 문서보관소에 가본 적이 있다. 엑스파일 파일럿과 리덕스에 나오는 펜타곤 기밀자료 보관/은닉소만한 규모는 절대 아니고, 작고 소박한(사실 소박하진 않은지도;;) 사설 보관소. 꽤 재미있는 곳이었다.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 서류들이 분류에 따라 규격화된 문서함에 넣어져 책장을 따라 줄세워져 있다. 인쇄된 것도 있고, 손글씨로 작성된 것들도 있다. 공적인 문서와 사적인 문서가 혼재한다. 묘한 느낌을 받았고 주는 곳이었다.


Posted by Iphinoe

In Good Company

afterwards 2008. 5. 13. 23:10

  오래 전 영화지만 봐야지 봐야지 벼르면서 못 보고 있다가 어제서야 봤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 낮에 이 영화를 스토리온에서 해주더군요. 대체 왜;;


  지나간 버스 아쉬워하는 거지만, 이 영화가 웨이츠 형제 영화인 줄 알았다면 개봉했을 당시 보러 갔을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홍보를 '아빠의 젊은 상사와 연애한 딸'에만 초점을 너무 맞춰서, 설정 특이한 걸로 승부하는 로맨틱 코미디인가 하고 안 갔거든요. '어바웃 어 보이' 만든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걸 알았다면 보러 갔었겠지요.


  할 얘기가 많았긴 하지만 다 관두고, 이 영화는 사실 아빠의 상사와 연애하는 대학생 딸이 중요한 게 아니라, 회사가 다른 회사를 인수합병하면서 낙하산으로 세일즈 팀장 자리를 꿰찬 스물 여섯 살의 풋내기 상사와,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순식간에 보좌역으로 밀려난 쉰 한 살의 세일즈 전문가가 어떻게 관계를 맺어가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열 여덟 살 딸이 그 상사와 데이트를 하게 된다는 건 서브 플롯이고요.


  그리고 영화는 이 설정을 다루는 데 있어 쉽게 가려 하지 않더군요. 두 청춘남녀는 서로의 위치와 상황을 다 알고 연애를 시작하고, 풋내기 상사가 경험부족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그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노련한 전문가가 큰 한 방으로 도와준다는 그런 해결책은 없습니다. 아주 없는 건 아닌데 그다지 노골적이지 않고, 그나마도 바로 이어 나오는 내용이 그 효과를 공중으로 날려버려요. (스포일러인가;;)


  그리고 남는 건 기묘한 상황에서 서로의 삶에 끼어들게 된, 공유하는 점이 별로 없을 것 같은 두 사람과 그 주변 사람들이 교류해 나가는 모습과 그 과정에서 주고받는 감정들입니다. '아메리칸 파이' 시리즈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어바웃 어 보이'에서 감독들이 하던 그 작업이라 그런 의미에서 반가웠고 그 때만큼 잘 해준 것이 역시나 고마웠습니다. (표현은 좀 이상하지만.)


  이런 영화답게 배우들이 참 좋았습니다. 타이틀롤 맡은 두 사람의 감정 기복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연기가 좋았어요. 전반적으로 배우들이 다 그런 편인데, 그래서 스칼렛 요한슨이 덜 부담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다른 영화에서 볼 때는 별로 안 좋아했거든요^^. 그리고, 카터 듀리아(풋내기 스물 여섯 살짜리 팀장)의 캐릭터가 은근히 재밌었습니다. 일부는 토퍼 그레이스의 순진무구한 얼굴이 주는 느낌이 실제 이상으로 작용한 때문이 아닌가 하는데, 실은 그거 말고도 많아요. "Ohmygod" 할 때의 하이톤도 은근히 귀여웠고 (특히 맨 마지막 장면에서 할 때는 귀여워서 쓰러졌어요), 조금만 상황이 이상해지면 반사적으로 "I'm sorry"가 튀어나오는 것도 섬세한 터치였습니다.


  찬찬히 생각해 보면 캐릭터들을 그려내는 방식은 캐리커처에 가까워서 얄팍하게까지 느껴지는데, 거기 그런 깊이와 공감대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연기와 연출과 각본 모두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역시 제대로 아는 게 없군요).


Posted by Iphinoe

  HOUSE : The patient was technically dead for over a minute.


  WILSON : Do you think he was dead? Do you think those experiences were real?


  HOUSE : Define real. (beat) They were real experiences. What they meant... Personally, I choose to believe that the white light people sometimes see, visions this patient saw, they're all just chemical reactions that take place while the brain shuts down.


  FOREMAN : You choose to believe that?


  HOUSE : There's no conclusive science. My choice has no practical relevance to my life. I choose the outcome I find more comforting.


  CAMERON : You find it more comforting to believe that this is it?


  HOUSE : I find it more comforting to believe that this... isn't simply a test.



  멀더와 스컬리가 하우스를 만났다면 하우스는 누구와 더 가까워졌으려나. :)


Posted by Iphinoe

  화려하고도 비밀스러운 이력을 지닌 옥스포드의 언어학 교수 제임스 애셔는 한밤중에 돌연히 한 스페인 귀족의 방문을 받는다. 그는 자신을 전설 속의 존재인 뱀파이어라 소개하고, 그들에게 닥쳐온 위협 때문에 애셔의 수사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부를 위해 비밀 요원으로 활약했던 경력이 있는 애셔는 분명 그들이 찾아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겠지만, 애셔는 그들 옆에서 존재론적(?) 위협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사건이 해결되면 그들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된 자신을 뱀파이어들이 살려두지 않을까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사건을 풀어 나가는 사이 어느덧 의뢰인이자 자기 목줄을 쥔 그와 신뢰를 쌓게 되고, 사건은 차근차근히 그 전모를 드러낸다.


  현실적이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들은 종종 아름다움이나 추함을 묘사하는 데 있어 극단을 달리는 통에 재미있어지곤 한다. 이 소설이 많이 빚지고 있는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도 그렇고, 이 소설도 그렇다. 근대적 인간인 애셔와 그의 아내 리디아의 캐릭터가 이들이 사는 세상을 우리 사는 세상으로 포섭해 오려고 애쓰기는 하지만, 그리고 추리소설/스릴러의 구조를 가져와 뼈대를 세우고 반전에 가까운 결말을 배치하고는 있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제일 인상에 남는 것은 500년 묵은 스페인 귀족 돈 이시드로의 캐릭터일 것이다.


  특별히 독창적인 이야기는 못 된다지만, 배경이 되는 시대에 주목하게 하는 덕분에 생각할 거리를 얻었다. 인류 역사에서 흥미로운 이행기가 되는 지점이 몇몇 있다. 그 중 근대라 불리는 18세기 후-20세기 초반은 시기적으로 우리와 가장 가깝기도 하고, (소설 속에도 언급이 나오지만) 우리 사고의 기반을 이루는(혹은 이룬다고 착각하는) '이성'의 세계로 옮겨가는 시대이기도 해서, 여러 모로 흥미를 끄는 것 같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 변화하는 이행기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혼돈, 그리고 다수 세계관의 공존은 여러 모로 매력적인 소재와 주제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의 분위기는 거기에 꽤 기대고 있다. 특히 뱀파이어의 존재를 생리학/화학적으로 증명해 보려는 리디아의 노력은 배경이 이 시대이기에 제일 빛을 발한다. 이 시대에 특징적이라 할 수 있을 그 미묘하고 섬세한 긴장이 배경으로 쓰인 것을 보니 흥미로웠다.


Posted by Iphinoe

  This afternoon Genly Ai spoke in the Hall of the Thirty-Three. No audience was permitted and no broadcast made, but Obsle later had me in and played me his own tape of the session. The Envoy spoke well, with moving candor and urgency. There is an innocence in him that I have found merely foreign and foolish; yet in another moment that seeming innocence reveals a discipline of knowledge and a largeness of purpose that awes me. Through him speaks a shrewd, and magnanimous people, a people who have woven together into one wisdom a profound, old, terrible, and unimaginably various experience of life. But he himself is young: impatient, inexperienced. He stands higher than we stand, seeing wider, but he is himself only the height of a man.



  (Ursula K. Le Guin, The Left Hand of Darkness)


Posted by Iphinoe

  어떻게 해서 집에 있게 된 책인지도 모르고, 얼마나 오래 집에 있었는지도 모르는 책이 몇 권 있다. '꼬마신관 타론'도 그 중 하나인데, 언젠가부터 그 책을 꽤 좋아해서 내 책꽂이에 (내가 책을 좀 밝히는데다 까탈스럽게 다루다보니;; 집 책 중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소유권을 분명히 하는 편이다) 꽂아놓고 그 동안 가끔 때때로 다시 읽어줬었다. 원제가 'The Blue Hawk(당연히 원제를 더 좋아한다)'이다.


  영국에서 아이들을 위한 판타지에 주는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는데, 스토리가 과연 우화적... 아니 신화적이다. 기원전의 이집트-분위기는 고왕국 같다-를 지리적/지역적/문화적으로 닮았으되 섬기는 신이 좀 다른 일종의 alternative universe에서, 어렸을 때부터 신을 섬기는 신관으로 뽑혀 신전에서만 자라온 타론이라는 아무 힘 없는 소년 신관이 아차 하는 사이에 신관 집단과 왕 사이에서 벌어지는 주도권 다툼에 휘말려들고, 그 와중에 성장통과 형이상학적&윤리적 성찰을 함께 겪는다는 내용이다. (별 내용 아닌데 엄청 어렵게 썼다;;;;)


  무엇보다도 그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꿈결처럼 떠도는, 약간은 현실과 유리된 듯한 (단지 판타지라서가 아니다). 가끔은 부유하는 듯하고 가끔은 냉철한 시각을 택하는, 아아 지금 내 지쳐빠진 뇌로는 정의가 안 되는 분위기. 책 표지 색 탓도 있겠지만 그래서 이 소설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색감이다. 붉은빛과 약간의 보랏빛이 진한 듯 연한 듯 섞인 노을의 강한 빛깔, 딱 그 색이다. 원색보다는 파스텔톤에 더 가깝다. 내 주위의 공간을 꽉 채우듯 다가와 어느새 나마저도 물들여버리는 색.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그 선명하면서도 모호한 인상이 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는 것 같다. 참 어렵다.


  주제는 놀랍게도 상당히 무겁다. 책을 아우르는 주제는 옳고 그름과 취사선택의 문제 & 정치적 선택의 문제 & 과하면 좋지 않다는 중도의 논리지만, 책 뒤로 가면 신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종교의 문제의 한 면도 비교적 예리하게 도려내어 읽는 사람 앞에 펼쳐준다. 애들 책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는데, 솔직히 원문을 접해보기 전까지는 딱히 애들만 보라고 쓴 책이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원문의 단어가 너무 애들용이어서 혹시 revised edition(단어를 쉽게 다시 고쳐쓴 버전을 뭐라고 하더라??)인가 생각했을 정도다.


  작가는 Peter Dickinson. 몇 달 전에야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SF계에서 유명한 작가라고 한다. 꽤 다양한 작품 활동을 했던 사람인 모양이다. 'The Blue Hawk'만 봐도 확실히 그렇다. 이 책이 워낙 안 유명한 책이라 - 상 탔다고 다 유명한 건 아니니까 - 작가도 그러려니 하고 생각해오던;; 참이라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었다.


  '내 어린 시절의 책'이랄 정도로 좋아하고 매료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언제든 다시 잡으면 좋고 흐뭇하고, 평생 곁에 두고 보물처럼 쓰다듬어주고 예뻐해주고 싶은 책이다. 다시 출판될 리 없을 것이라 추천할 수가 없어 아쉽다. :)



  (2003. 12. 01)


Posted by Iphinoe

  '호프만의 허기'에서 슬픈 대목들 중의 하나는 사진과 관련되어 있다. 미리암은 부모와 통화할 때마다 앨범을 보내 달라고 한다. 어렸을 때 행복했을 때 가족들이 같이 찍은 사진들이 보고 싶다고. 부모는 사진을 보낸다. 그러면서 네 사진도 좀 더 자주 찍어 보내 달라고, 우린 네 사진이 많지 않단다, 그렇게 얘기한다. 아이가 죽고 나서 그들은 아이가 앨범에서 자기 모습만 몽땅 오려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다.


Posted by Iphinoe

소사

afterwards/chitchat 2007. 6. 6. 15:39

  엘러리 퀸은 내가 닮은 점이 있다기에는 너무 잘난 캐릭터지만 - 흥 - 공유하는 점이 하나 있긴 하다. 아마도 '엘러리 퀸의 모험'일 단편집에 나오는 '보이지 않는 연인'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구절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엘러리가 신부에게 자신은 "되지 못한 상상을 잘 하는 편"이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내게는 늘 '돼먹지 못한 상상'으로 기억되는 이 구절-_-;;은 그 뒤에도 엘러리 퀸을 생각할 때 쉽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최근 와서 깨닫고 있는데, 나 역시 그런 편이다-0-


Posted by Iphinoe

  (내용 추가하면서 등록 일자를 갱신했습니다.)



  Peter Dickinson의 1988년 작품.


  디킨슨이 자기 홈페이지에서 본인이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해왔고 책을 여러 권 냈음에도 받은 피드백의 70%는 이 작품에 대해서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 대표작입니다. 디킨슨은 다양한 분야에서 책을 냈습니다만, 제가 접했던 건 아동/청소년물 작가로서였고 Eva도 그 부류에 속하는 작품입니다.


  디킨슨은 현재 70대의 노령 작가이고, 책도 한두 권을 쓴 게 아니기 때문에, 그가 받은 피드백의 반 이상이 'Eva'에 대해서였다면 그건 그 작품이 엄청나게 감동적이거나, 아니면 엄청나게 논쟁적이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했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판단은 후자 쪽으로 기웁니다. 번역되지 않았고 번역된다는 소식도 들은 바 없어, 핵심 내용들을 그대로 다 소개하겠습니다.


  'Eva'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코마 상태에 빠진 아이의 의식을 되살리기 위해 침팬지의 몸 속에 아이의 정신을 이식한다는 것은, 윤리적 정신적 감정적 문제를 낳을뿐더러,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는 (책에 잠깐 언급된 것처럼) 법적 문제까지 야기합니다.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죠. 하지만 'Eva'의 초점은 무차별적으로 팽창해 나가는 인간들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것인가, 문명의 종점은 어디일까, 그 후의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그런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인간의 사고를 할 수 있기에 미래를 고려할 수 있는 Eva는 침팬지의 사회에서 그들에게 독자적인 생존 방식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고, 인류의 현재를 통해 암울한 전망을 읽어내는 일부 사람들은 Eva에게 인류의 미래를 투영하고자 합니다. 거기에 환경주의자들도 있죠. 그리고 기업의 영리와 홍보와 투자가 모두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디킨슨은 굳이 프로파간다를 이야기 속에 은근히 퍼뜨려 놓을 만큼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의 화법은 Eva를 통해 나타나건, 건조한 묘사나 서술을 통해 드러나건, 충분히 직접적입니다. 그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암울한 전망을 제시하고 있고, Eva를 통해서는 ...이 부분을 잘 모르겠습니다. 디킨슨이 Eva를 통해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Eva가 침팬지들을 인간들의 보호구역에서 얼마 남지 않은 야생의 숲 속으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Eva가 모범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Eva는 매우 특수한 개체였고, 그의 독특한 정신은 후대에 전혀 계승될 수 없는 것입니다. Eva가 남긴 유산은 인간들로서는 따를 수 없는 것이고, 침팬지들에게는 매우 제한적으로만 남겨질 수 있을 뿐이니까요. 제 2, 제 3의 Eva를 만들려는 노력은 책 속에서 모두 실패로 돌아갑니다.


  논쟁적인 작품일 거라 생각하긴 하지만, 디킨슨이 인간들의 앞날에 대한 경고 외에 더 하고 싶은 말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Eva는 너무 독특하기에 동일시하기도 사랑하기도 힘든 인물이고, 그 점에 있어서는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이(인간과 침팬지를 모두 합쳐)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나 그 어떤 것도 분명하지 않은 느낌입니다. 무분별한 개발과 확장, 자연 파괴에 대한 뚜렷한 경고의 메세지 이외에는요.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매력적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 아무래도 이 작가가 그려내는 미래보다는 과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2006년 10월 1일)




  (2007. 05. 16 덧말)

  리퍼러 기록을 통해 간 링크에서 홍인기 님의 Eva 리뷰를 읽은 덕분에, Eva가 다룬 소재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최초의 어머니/여성 신화'라고 일컬어지는 이 테제가 아주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분명 어디선가 접한 적이 있다 싶긴 한데, 설사 그렇다 한들 그다지 잘 아는 내용은 아닙니다.


  덕분에 Eva의 이야기가 어디에 뿌리를 대고 있는지는 알았습니다만, 그럼에도 잘 모르겠어요. 뭔가 명쾌하지 않다는 느낌은 여전합니다. 디킨슨이 미래 세계를 그렸기 때문일까요? 워낙이 디킨슨은 아동/청소년 소설을 쓸 때는 우화에 가까운 이야기를 자주 시도하는 것 같습니다. <꼬마신관 타론 The Blue Hawk>도 그렇고 <킨 The Kin>도 그렇거든요. 하지만 두 이야기는 각각 고대 사회와 원시 사회가 배경이고, <에바 Eva>는 미래 사회가 배경이지요. 그 차이를 제가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여전히 물음표가 남아 있으니, 아직 깨우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닫기

Posted by Iphinoe

  필립 K. 딕의 팬이라면 별로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은 영화지만, 상업영화로서 그다지 허점은 없어 보였다.^^ 소도구 중의 하나로도 등장하는 십자말 풀이처럼, 스무 가지 자잘한 물건들의 용도가 퍼즐 맞추는 듯 상황에 맞게 경쾌한 리듬으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웠기 때문이다. 플롯이 치밀하게 짜여 있지는 않고, 이것저것 파들어가다 보면 구멍이 많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영화를 즐기는 데 문제가 되지는 않을 뿐더러 어떨 때는 그런 점들이 되려 잔재미를 더해주기도 하니까.


  자잘한 재미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기분전환이 확실히 되어주어서 좋았다. '인류 운명' '결정론' '인생에서의 두 번째 기회Second chance' 같은 이야기들이 줄줄이 쏟아져나오긴 하지만 그것들은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맞추는 도구에 불과하고, 중요한 건 주인공이 그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그보다 더) 어떻게 때려부수느냐;; 하는 거다. 그리고 나는 그 점에 전혀 불만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Face/Off도 SF영화인 셈인데, Face/Off의 아이디어도 상당히 필립 K. 딕 같았었다.


  오랜만에 보는 Paul Giamatti가 반가웠고 (안 죽어서 더 반가웠다. 이런 위치에 있는 역은 대개 1.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2.주인공의 분노를 정당화해줌과 동시에 어느 정도는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영화가 종반으로 접어들기 전 죽어버리는 일이 많아서... 이 아저씨가 죽었으면 상당히 섭섭했을 것이다), Six Feet Under의 장의사 집 둘째아들과 Speed의 반장님이 FBI의 두 요원으로 나와서 재미있었다. (Six Feet Under의 배우는 Dark Angel의 Agent White와 묘하게 인상이 닮아서 늘 좀 헷갈린다.)






  그리고 ㅡ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까먹었다. 역시 희망은 로또였다.



  (2004. 01. 28)


Posted by Iphinoe

  사실 이 시간에 이런 거나 찾고 있으면 안 되지만...




  덱스터Dexter의 음악을 맡은 (오프닝 테마 제외) Daniel Licht가 자신의 공식사이트에 덱스터 음악들을 공개하고 있었군요. http://danlicht.com인데, 문제는 지금 가보니 Dexter audio clip의 플레이리스트에 다른 음악들만 잔뜩 있고 정작 덱스터 음악이 없더라 이겁니다. :) 아무래도 오류인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군요. 1시즌만으로 사운드트랙 소식이 있다니 그런 문제로 내린 것일지도.


  그러나 친절하신 구글신의 도움으로 더 친절하신 어떤 분께서 공개된 음악들을 한데 모아 zip파일로 만들어 인터넷에 올려두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http://www.sendspace.com/file/yxrgrg 여기로 가시면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Dan Licht는 그 외에도 myspace를 통해 Dexter의 음악을 몇 곡 들을 수 있는 경로를 열어두었습니다. 주소는 http://www.myspace.com/danlichtdexter입니다. Jon Licht (혈연 관계이겠거니 싶습니다) 역시 Dexter를 위해 작업한 곡들을 myspace를 통해 공개하고 있습니다. http://www.myspace.com/suckerinc로 가시면 됩니다. Jon Licht의 공식사이트는 http://www.lichtmusic.com이고, 생긴 지 얼마 안 돼 아직 공사중이라는군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덱스터의 오프닝 테마 데모 버전을 듣고 싶으신 분들은, 오프닝 테마를 작곡한 Rolfe Kent의 홈페이지 http://www.rolfekent.com의 download 페이지에 가시면 파일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Kent가 작업한 영화 음악들이 다수 있으니까 관심있으신 분들은 더 들어보세요. Just Like Heaven, Kate & Leopold, Legally Blond I & II 등등 그리고 알렉산더 페인의 모든 영화(Citizen Ruth, Election, About Schmidt, Sideways)를 맡아 했습니다.


Posted by Iphinoe

  얼마 전 다음 학기 수업 때문에 '군주론'을 읽었습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정치사상서가 그 이전까지의 책과 다른 점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가 아니라 '현실이 이렇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 한다'에 집중했다는 점에 있죠. 물론 수단은 목적에 봉사하고, 여기서의 목적은 '군주의 권력 유지와 확대'에 있습니다. (그 권력을 갖고 어디에 쓸 것이냐는 군주에게 달렸습니다만,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써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는 것으로 보아 마키아벨리는 이 책에서는 적어도 '모두가 안전하게 ㅡ 행복하게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ㅡ 살 수 있는 나라' 정도를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군주에게 돌아가는 것은 명성과 권력, 그리고 그에 따르는 부와 안전이겠지요.)


  그의 주장의 요지는, 사람은 이상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페어 플레이를 하다가는 권력 근처에도 못 가보고 몰락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키케로의 구분을 빌려 세상에 존재하는 싸움의 종류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법률에 의거하는 싸움이고 다른 하나는 힘에 의거한 싸움인데, 첫 번째 방법은 인간의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짐승들의 것이랍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서 첫 번째 방식을 따른 싸움만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언제든 두 번째 방식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법정 영화인 이 영화에서도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을 갖고 있고 그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기적인 악의 화신으로 설정된 악덕 변호사(라기보다는 기실 브로커나 스토커에 가깝습니다만^^)는 당연히 짐승들의 방식을 택하고, 반대편에 서 있는 변호사 ㅡ 준비한 것은 논리와 이상과 열정뿐인 ㅡ 는 그런 적에 맞서 과연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를 고민합니다. 법정에서의 승리가 가져올 사회적인 파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때, 그것을 이끌어내기 위해 가야 하는 길이 더럽다면 과연 그 길을 가야만 하는가, 의 문제가 되겠지요. 과연 그는 흔들릴까요?


  영화를 보시면 이 질문이 사실 두 번 제기된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겁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자기의 손에 패를 쥐고 게임을 합니다. 목표는 승리와 그 승리가 이끌어낼 부산물입니다. 누가 이길 수 있을까요? 강한 자가 늘 이기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개는 강한 자가 이기기 쉽습니다. 그리고 모두를 배려하기 위해 설정된 규칙에 따르는 사람보다는 그 규칙을 따르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사람이 더 강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게임은 두 번 반복됩니다.


  이 영화는 영미법 계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을 배심원 제도가 지닌 맹점을 다룬 법정 영화이자 스릴러입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이 싸움은 법정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 뻔한 영화가 시사하는 바는 꽤 흥미롭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늘 하는 잡담.


  1. 존 큐색/더스틴 호프만/진 해크먼/레이첼 와이즈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극도로 피했는데, 잘한 짓이었습니다. 이 영화 보실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신 분들은 영화 선전용 전단지도 보지 말고 가세요^^ 좀 역설적인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역시 아무 것도 모르고 가는 게 좋군요.-_-;;


  2. 큐색은 이 영화를 Identity 찍고 나서 찍은 모양인데, 더 젊어진 것 같습니다-0- Identity나 Grosse Pointe Blank에서는 무언가 좀 부자연스럽게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는데 그건 연기였던가 봅니다. 압도적이거나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인상적인 (하도 키가 커서 그런지도 모르지만요) 모습이어서 좋았습니다. 하긴 역이 그렇군요.


  3. 더스틴 호프만 아저씨, 나이를 잡수셨습니다.. 당연한 일인데,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익숙하고, 권위적이고, 열정적이고, 사려깊고, 고뇌하고, 여전히 멋있었습니다.


  4. 진 해크먼, ^^d


  5. 전 레이첼 와이즈가 참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매스컴을 잘 타는 것 같지는 않은데, 보고 있으면 정말 예뻐요. '미이라'로 알려져서 그렇지, 상당히 다양한 역을 소화하더군요. 편안하고, 아름답고요. 큐색이랑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6. 딜런 맥더못이 나와서 5분만에 죽습니다-0-;; 제 가슴이 아프더군요. 큰 화면에서 보기는 처음인 듯 싶은데.. The Practice는 이미 끝났나요? 어떻게 끝났는지 아시는 분 계세요?


  7. 재판정 안에서 벌어지는 일보다 재판정 뒤와 밖에서 벌어지는 일이 주가 되다 보니, 그리고 피고 측 변호팀에서 변호사보다 배심원을 담당한 인물이 더 중요한 존재로 나오다 보니 정작 defending lawyer가 조연도 그런 조연이 없더군요. 그러나, 물론, 그런 역은 '그럼에도' 제 역할을 해줄 사람이 맡아야 하는 법. 엑스맨에서 신판 맥카시 상원의원을 맡았던 아저씨, 깐깐한 역에는 전문인데 이번에도 역시 변호사 역을 맡으셨습니다. 전 왠지 이 분 봐서 반갑더만요.


  8. 잘려나간 스토리라인이 두엇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연 여자 중 하나를 조금씩 오래 비춰주는데다, 초반에 중요한 듯 나온 웬들 로(더스틴 호프만)의 조수 역할을 맡은 사람이 뒤로 가면서 그냥 빠져버리더군요. bluffing일 수도 있지만요.


  9. 엔딩 크레딧 음악이 좀 이해가 안갑니다. 너무 서정적이었어요.


  10. 나와서, 이 영화 전단지를 찬찬히 훑어보다 그제서야 알았는데, 전단지에 '존 그리샴의 원작'만 커다랗게 박혀있고, 주연 배우 넷에 대한 간단한 소개도 있는데 감독 이름은 없더군요. 그러고 보니 저도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누군지 모릅니다. 스타 파워라는 게 이런 것이로군요. (새삼스럽게-_-;;)



  (2004. 02. 04)


Posted by Iphinoe

  원작도 배경이 베니스였는지 궁금하다. 물, 그것도 빛이 잔영처럼 흐르는 물 ㅡ 런던에서도 베니스에서도 비가 아주 자주 온다 ㅡ 이 자주 등장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결말도 궁금하고.



  (2004. 02. 28)


Posted by Iphinoe

score albums

afterwards/chitchat 2007. 4. 15. 21:23

  The X-Files
  Millennium
  Stargate SG-1
  Monk
  The Saint (이건 영화)
  The Illusionist (이것도 영화)
  Dexter



  스코어에 관심 있는 작품들. 드라마 위주로 적었다. 영화는 리스트가 따로 있...나?


  엑스파일은 너무 당연하지만; 현재 나와 있는 초기 시즌보다는 3,4시즌부터 7시즌까지의 음악이 나와줬으면 좋겠다. 9시즌까지 나온다면 Scully's Theme을 빼야 한다. 그리고 실은 밀레니엄 음악이 더 좋다^^; 호세 청 에피에 쓰인 음악 같은 건 엄지손가락을 세 개쯤 세워줘야 하고, 2시즌 A Room With No View의 'Love is Blue'도 거기 쓰인 버전으로 갖고;; 싶다. (역시 소유욕.)
  Luminary 에피를 깜빡할 뻔하다니! 하지만 그건 대사 있는 버전으로 들어도 매번 홀려서 정신을 못차리기 때문에 음악만 따로 듣고 싶다는 생각은 잘 안 하게 된다. 스몰빌에서의 마크 스노우는 어떤지 궁금하긴 하지만 그걸 확인하자고 드라마를 보고 싶지는 않아서. :)


  Stargate SG-1은 오프닝 테마에 쓰인 원래 영화의 테마도 좋아하고, 스코어도 종종 정말 좋은 음악들이 있다. 이 드라마도 대사 없이 음악만 깔리는 경우는 드물어서 CD를 탐내게 하는데, 내가 아직 4시즌까지밖에 못 봤고 스코어 앨범은 두 장 나왔다는 게 갈등요인. 그리고 음악을 따로 들어서 괜찮을지 잘 모르겠다. 전반적으로 다 좋긴 하지만 그런 느낌을 주는 스코어는 많지 않았던 것 같거든.
  (물론 내가 기준을 다르게 적용하고 있는 거다. 엑스파일이라면 극중에서 들어서 좋았으면 따로 들어도 좋을까 그런 고민은 안 한다-_-;;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밀레니엄도.)


  Monk는 앨범을 들어보고 나서는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는 쪽으로 기울긴 했지만 아직 내 머릿속 목록에 들어 있다. 정말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음악이 머리 사이로 술술 빠져나가 버리는 것 같아서... 그리고 재밌는 곡과 심심한 곡이 뒤섞여 있다. (대부분의 스코어 앨범이 그렇긴 하다.) 물론 1시즌의 오프닝 테마는 아주 좋아한다. Sideways OST를 좋아하는 것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그게 내 취향인 듯. 근데 둘이 같은 계열 음악이 맞나?


  The Saint는 찾아온 햇수가 있어서 우야든둥 포기 못 한다-0-. (이젠 집착까지.) 아니, 감독이 DVD에 코멘터리 넣은 거 보니까 '소리'에 정말 신경을 썼더라고요. 그걸 봐서는 음악감독이 누구였건 간에 실망하진 않을 것 같다. 그리고 CD 표지가 정말 멋지더라. (쿨럭)


  The Illusionist의 음악은 약간 단조롭지만 영화하고 잘 어울렸었다. 솔직히 음악이 뚜렷이 기억에 남은 건 오프닝, 클라이막스, 엔딩 이렇게 세 부분에 불과했지만 (그리고 세 부분 다 음악이 비슷하다). 그래서 목록에 넣어놓긴 했는데 우선순위는 낮은 편. 이 두 영화 말고도 뭔가 더 있었을 텐데... 소공녀? 머릿속에 목록을 만들면 이렇게 된다-_-


  Dexter는 이번에 건진(?) 수작인데, 처음엔 오프닝 테마를 Rolfe Kent가 맡은 게 관심을 끌었다만 (그가 Sideways 음악을 맡았다), 지금은 오프닝 테마보다도 중간중간 당기는 스코어들이 종종 있어서. (음악가는 다르다.) 이것도 1시즌을 다 보고 나서 뭔가 말을 해야겠지만, 그리고 음반이 나와줄지는 잘 모르겠지만... 스코어 음반 시장은 미국에서도 그렇게 인기있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제발 엑스파일하고 밀레니엄 좀 내주오ㅠ.ㅠ 다른 거 없이 음악만 들어보고 싶다고 진짜.


Posted by Iphinoe

  한마디로, 아기자기하고 유쾌하고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


  본 영화나 글의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합니다.;; 보실 분이 있으시다면 그 어떤 줄거리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제가 쓰는 줄거리는 제 입장에서 쓰는 거니까, '관객'을 오도할 가능성도 그만큼 높지 않겠어요^^ 게다가 전 별로 객관적인 관객도 아니거니와 전문적인 지식도 없는 시청자일 뿐이고요.


  그러나 이렇게 사설이 긴 것은 당연히 이 영화에 대해서는 줄거리를 이야기할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줄거리가 큰 의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줄거리 빼고는 할 이야기가 완전히 파편화되어 있어서요.^^;;


  많이 알려진 영화라면 굳이 이럴 이유가 없는데, 나름 소품인지라 별로 아시는 분들이 많지 않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기압인 날 깔끔하게 보실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 소개합니다. 보고 나면 이런저런 생각도 들게 되고요.


  일 주일쯤 전에 DVD로 빌려다 다시 봤는데, 다시 봐도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제목이 여러 가지 의미로 중의적이라는 것도 더 눈에 잘 들어왔고요. 아기자기한 면들이 한꺼번에 저를 덮쳐서 아주 유쾌했답니다.




  스토리.


  뉴욕의 어느 밤거리를 술에 잔뜩 취한 한 남자가 헤매고 다닙니다. 지나가던 행인은 중심을 못 잡고 거리 한쪽으로 쓰러져 버린 그를 노숙자로 착각해 먹던 햄버거를 쥐어주고 가기도 하죠. :) 한 술집으로 들어선 그는 바텐더와 왜 자기가 오밤중에 집에도 안 들어가고 술에 절어 거리를 헤매고 있는가에 대한 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뉴욕 토박이인 두 친구가 있는데, 하나는 카톨릭 신부고 다른 하나는 랍비입니다. 둘은 어렸을 때부터 내내 한 마을에 살던 단짝친구였지요. 유순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던 브라이언은 일찍부터 소명 의식과 함께 신부가 되기로 결심했고, 유태교 가정에서 자라난 제이크는 성격 좋고 뭐든지 잘 하는 학교의 스타였습니다. 그러나 둘이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 훨씬 이전인 초등학교 시절 둘은 한 여자아이를 알았답니다. :) 애나는 괄괄한 말괄량이였고, 의협심에 넘치고 선머슴아이같은 친구였어요. 셋은 애나가 아버지의 전근으로 캘리포니아로 떠나기 전 2년 동안 완전히 세 쌍둥이처럼 붙어다니며 잘 지냈었습니다. 애나가 떠난 이후 연락은 끊겼지만 남은 둘은 서로 다른 종교에 몸담기로 했음에도 단짝친구로 지냈고, 공부를 마친 후에는 둘 다 자라난 마을로 돌아와 그 곳 교구의 사제가 되고 랍비가 되었습니다.


  헥헥. 여기까지가 초반부 20분 안에 지나가는 '배경'입니다. 아, 배경 하나 더 남았군요.


  교황청에서 임명하는 카톨릭 사제는, 공무원처럼 스캔들이라도 나기 전에는 고정불변의 확고한 지위를 누립니다. 그러나 랍비는 마을 단위로 고용되어 오는 사람에 가깝기 때문에, 이사회에서 '저 랍비 마음에 안 든다'고 결정하면 그곳을 떠나야 하지요. 하여 브라이언은 이미 교구 사제로 임명받아 선배 신부의 지도와 편달 아래 안정된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반면, 제이크는 선임 랍비의 은퇴가 임박하자 일종의 '재신임' 과정을 거쳐야만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제이크가 주임 랍비가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꼭 필요한 게 있으니, 바로 아내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자는 자고로 회당을 총괄하는 랍비로 임명된 선례가 없다,는 것인데요, 따라서 제이크는 선임 랍비의 은퇴 이전에 결혼을 해야만 하고, 종교적 공동체의 특성답게 서로가 서로의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아는 속성상 제이크는 경매에 내놓은 매물처럼 이리저리 맞선 자리에 끌려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그리고 제이크는 자신이 한 명의 '남자'로서가 아니라 '랍비'로서 수많은 신부 후보감들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하죠.


  그 때 캘리포니아의 애나가 연락을 해옵니다. '병든 회사를 치료하는' 일을 맡아 하는 능력있는 커리어 우먼으로 성장한 애나가 뉴욕에서 얼마간 일을 맡게 되어 이쪽으로 오게 되었기에, 옛 친구들을 다시 보고 싶었다는 것이죠. 세 친구는 금세 다시 뭉쳐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어마어마한 실패로 끝난 제이크의 데이트, '하느님보다도 더 바쁘'다는 애나의 스케쥴과 쉴새없는 핸드폰 통화는 그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농담거리가 되고, 애나는 신부로서 금욕을 지키기로 서약한 브라이언의 결심에 대해서 궁금하기도 하고요.


  제이크의 또 한 번의 선을 도와주기 위해 애나와 브라이언은 연인으로 가장하고 더블 데이트에 나가는데, 내내 그 동안 서로에게 빠져 있던 제이크와 애나는 '때 빼고 광 낸' 데이트 자리에서 서로를 계속 의식하다 결국 그 날 이후로 비공식적인 데이트를 하게 되는데, 둘은 애나가 곧 돌아가야 한다는 점 그리고 랍비로서 제이크의 결혼이 간단치 않다는 점 등등을 고려하여 잠시 즐기는 관계로만 남기로 합니다. 그리고 둘은 브라이언이 '불편해할까봐' 이 사실을 비밀로 하죠.


  그러나 정작 브라이언은 애나에게 점점 애정을 느끼고 있었으니...


  짜잔. 여기서 끊겠습니다. ;) 궁금하시면 빌려보세요.




  사실 스토리 그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어법을 따르고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깔끔한 영화가 어떻게 끝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모두 다 잘 알고 있잖아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재밌고 귀엽고 아기자기하고 유쾌하지만, 심각하고 열렬하게 탐구되지는 않아도 로맨스가 발전하고 위기를 맞고 끝나는 사이에 파생되는 이야기들 그리고 그것들이 발을 담그고 지나가는 이런저런 문제들이 또한 아주 흥미롭습니다. 그것들은 크게 두 가지로 묶을 수 있는데, 하나는 제목이 말해주듯 faith 그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관계맺음의 문제. 영화 속에서 둘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Keeping the Faith는 문자 그대로 하면 '희망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내일 일이 잘 됐으면 좋겠어" / "믿음을 가져" 이런 식으로 쓰이지요. 하지만 사랑과 자신이 세운 서약 사이에서 갈등하는 브라이언의 입장에서 이 문장은 문자 그대로 '믿음을 지킬 것이냐'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faith가 '믿음'이라면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 이는 trust와도 어느 정도 연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제이크와 애나의 경우, 그리고 제이크와 이 회당을 둘러싼 유태인 공동체의 경우에 이 문제는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의 문제가 되죠. 특히나 랍비로서 자신이 이끄는 사람들에 대해 책임이 있고 의무가 있는 제이크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영화 속에서 제이크는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짚고 넘어갑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만큼 탐구되지는 않지만 애나의 캐릭터에 있어 숨겨진 동기와 갈등을 제공하는 문제인데, 바로 애나가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세속적인 캐릭터였다는 것이죠. 애나는 물론 밝고 착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공격적인 전문 경영인들의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강한 사람이기도 하고, 그런 만큼 애나의 세계는 그동안 기업들이 먹고 먹히는 생존 경쟁 속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던 겁니다. 자신이 거둔 성공이 충분히 자랑스러운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제이크와 브라이언이 공동체 속에서의 영적 생활을 추구하는 모습을 존경하는 만큼 애나는 알게 모르게 열등감을 느낍니다. 이 문제는 애나와 제이크가 크게 싸움을 벌일 때 터집니다. 제이크는 아무 것도 모른 채로 애나의 마음에 비수를 꽂죠. :)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건 이 영화 속에서는 religion으로서의 faith에 대한 이야기까지 함께 하고 있다는 겁니다. (faith를 갖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관한 브라이언의 설교는 그 한 예입니다.) 제이크와 브라이언은 모두 기존의 방식에 젖어 있는 유태인/카톨릭 공동체에 혁신을 가져오려는 사람들입니다. 그 혁신은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무관심해 일요일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 10명이 채 될까말까한 공동체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기도 하고, 한 믿음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믿음에 대해 이해하고 서로의 믿음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이크와 브라이언은 모두 서로의 예배에 참석하고 있고,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두 친구의 프로젝트는 카톨릭과 유태인들이 모두 함께 참여하는 쉼터, 일종의 클럽을 만드는 것입니다. (완고한 유태인 장로들을 바꾸려는 제이크가 정작 자기 어머니와 형 간의 종교적 불화에는 속수무책이라는 점은 재미있는 아이러니입니다. 특히 이 문제는 영화 내내 가장 큰 긴장 요인이거든요.)


  이 영화는 깔끔한 로맨틱 코미디이면서, 랍비와 카톨릭 사제를 등장시킨 유쾌한 농담이고 (실제로 이 영화의 아이디어는 작가 중 한 명이 서점에서 랍비와 신부에 대한 농담을 읽던 중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게 어떤 것이며 사람이 신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영화입니다. 아주 재밌었어요.




  그리고...

  1. 코드 3 DVD 오디오 코멘터리에는 자막이 없습니다;; 영어 자막이라도 있으면 급한 대로 켜놓고 보겠는데 그것도 없더군요. 학교 숙제로 지도 그리느라 밤중에 모니터에 종이 두 장 겹쳐 대고 삐뚤빼뚤 선 따라 지렁이 지나간 자국을 그리면서 들었습니다-_-;;


  2. 하버드 출신들에 대한 조롱조의 조크가 잠깐 지나갑니다. 각본 작업에 참여하고 감독/주연을 겸한 에드워드 노튼이 예일 출신이라 그런지 새삼스럽게 주의가 환기되더군요.


  3. 코멘터리에 나오는 재미있는 trivia인데요, 각본을 쓴 스튜어트 블룸버그와 감독 에드워드 노튼은 이 각본을 쓰는 내내 처음부터 벤 스틸러를 염두에 두고 있었대요. 그들은 아예 랍비 슈램의 이름을 벤으로 지어놓고 벤 슈램이라고 불렀답니다. 그러나 벤 스틸러가 이 역을 최종적으로 수락한 뒤에는, 스틸러가 자기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진 캐릭터를 연기하는 걸 싫어해서 이름을 바꿔야 했다는군요. 코멘터리 도중에 한 번 블룸버그가 제이크 슈램을 벤 슈램으로 잘못 불러요. :)


  4. 역시 코멘터리에서. faith를 갖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브라이언 신부의 설교는 실제로 어떤 주교가 한 설교라고 합니다. 실제 성당과 유태교 회당의 분위기를 알아보기 위해 취재차 여기저기 다니던 도중에 듣게 된 설교인데, 너무 좋아서 그 자리에서 받아적고 나중에 주교를 만나 그 내용을 쓰게 해달라고 설득했다고 합니다.


  5. 랍비는 평소에 따로 유태인들의 모자를 쓰고 다닌다거나 하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거의' 일반인처럼 보이지만, 신부는 그 신부복 칼라 때문에라도 눈에 띄잖아요. (요즘 신부님들은 그걸 평상복 차림일 때는 그걸 착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만.) 그 문제에 대한 농담도 영화 내내 나옵니다. 특히 두 번째 농담은 아주 재밌습니다. (역시 코멘터리에 따르면) 테스트 시사회 때 그 두 번째 농담이 나오자 관객들이 열광적인 박수로 화답해서, 그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 분위기 전환용으로 없던 신을 하나 넣어야 했다더군요.


  마지막. 이렇게 길게 쓸 마음이 꿈에도 없었는데 글이 기록적으로 길어졌습니다.;; 놀랍네요.


  닫기



  (2004. 03. 20)


Posted by Iphinoe

사이드바 열기